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511
일 자
2007.11.26 19:34:19
조회수
2518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44>소련 공군의 참전과 스탈린의 역할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4>소련 공군의 참전과 스탈린의 역할
北, 제공권 장악 美 공군 대항 지원 요청


▲소련 공군의 참전 배경
6·25전쟁을 위한 남침 준비과정에서 소련의 스탈린은 주동적 역할을 했다. 실제로 소련은 북한 정권의 산파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을 창설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소련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북한군의 편제, 무기 및 장비지원, 군사훈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지원하고 지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에 남침전쟁계획까지 수립해 주면서도 자신들의 개입을 비밀로 하기 위해 전쟁 직전 북한군 전투부대에 파견된 고문단을 전원 철수시키고 총참모부에 남아 있던 고문단에게는 38선을 넘지 않도록 엄명했다.하지만 6·25 남침 이후 미국의 참전으로 제공권을 빼앗긴 북한은 미 공군에 맞설 공군지원을 소련에 긴급 요청했다.

소련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후 연해주에 배치된 항공기 40대를 북한에 파견하는 문제를 검토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유는 소련 전투기가 미 공군기와 공중전을 벌일 경우 러시아어로 이루어지는 무선 교신으로 소련 참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다. 그러나 38선이 돌파되면서 전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북한이 지원을 요청해오자 이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1950년 9월 말 김일성·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의 참전을 요청했다. 북한의 파병 요청에 대해 스탈린은 소련군 참전 불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은 북한의 지원을 요청받고 참전에 따른 무기원조와 공중 엄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0월 8일 주은래·임표를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지원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공은 모택동의 결단으로 북한 파병을 결정하고 행동에 옮겼다. 중공의 파병 결정에는 한반도가 자신들을 위협하는 기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숨겨 있었다. 그러나 중공이 북한에 파병한 후 스탈린은 유엔 공군의 공격을 엄호해 달라는 중공의 요청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공군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스탈린이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중공의 강력한 요구도 한 몫했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공군만으로는 유엔군을 막아낼 수 없을 뿐더러 공군 지원이 지상군 참전에 비해 비밀 유지가 훨씬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군의 참전
소련 공군의 참전은 50년 11월 1일부터 시작됐다. 소련 64항공군단은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에 대항해 주로 방어임무에 치중했다. 최초 소련 공군은 중국지역의 주요 시설과 압록강 교량 및 수력발전소 등의 방어임무를 수행했고, 이후에는 평양~원산선까지 작전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 공군을 참전시키면서 한국전선에 투입된 소련 항공기들을 모두 중공·북한기로 위장했다. 이는 미국을 자극해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스탈린의 조치에서 나왔다. 스탈린은 이외에도 많은 조치를 취했다. 51년 6월 그는 중공군 군사고문 크라솝스키와 64항공군단장 벨로프에게 중공 조종사 훈련에 진척이 없는 것을 질책하면서 중공의 8개 전투비행사단을 집단으로 편성해 전선으로 파견할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소련 공군은 한국전에 참전해 중공군의 지상 작전을 엄호, 중공군의 전투력 운용 융통성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유엔 공군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이렇듯 스탈린은 전쟁 기간 북한·중공에 대한 지속적인 군수지원 및 공군지원을 통해 버팀목 역할을 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1.26]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다시보는 6·25-<45>아이젠하워 방한과 대한정책 변화
이전글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43>장개석 ‘자유중국군’의 파병 제의와 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