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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1 20: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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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46>이승만 대통령과 한미연합군 지휘관들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6>이승만 대통령과 한미연합군 지휘관들
한미군 지휘관을 지도한 전쟁지도자


▲이승만의 역량과 능력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도하고 총괄했다. 여기에 국군은 물론이고 한국을 지원하러 온 미군 장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동안 그가 상대했던 사단장 이상 지휘관은 국군 50명과 미군 60명이었다. 그는 역사상 어느 전쟁 지도자 못지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군에 대한 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군사지식을 교육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전쟁 지도자로서 그의 역할은 단연 돋보였다.

그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 이대통령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같은 군사학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서(經書)·병법을 통해 국가통치의 도(道)와 군사전략 개념을 터득했다.

둘째, 이대통령은 군 복무도, 참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대통령은 미국 역사를 통해 정치 지도자와 명장의 리더십을 간파했다. 미국 독립전쟁 시 워싱턴 장군의 역할과 남북전쟁 시 링컨 대통령과 그랜트 장군, 제2차 세계대전 시 루스벨트 대통령과 맥아더·아이젠하워 장군의 뛰어난 업적에 정통했다. 그는 전시 총사령관과 국가 지도자로서의 덕목과 역할을 미국 역사를 통해 습득했다.

셋째, 그는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견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발간,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큼 뛰어난 국제정치 감각을 지닌 한국 최초의 국제정치학자였다. 그러한 통찰력을 지녔기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시 영국의 처칠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을 끌어들여 북한의 남침을 막고 북진통일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한국의 안보를 보장받아 국제정치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대통령과 지휘관들

이대통령의 전쟁목표는 북진통일이다. 이에 그는 전쟁에서 지휘관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가 중시했던 지휘관의 덕목은 전쟁목표를 실현할 의지가 있고, 전투를 잘 하고, 국가에 봉사하고 통수권자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군 지휘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군인의 본분을 알고 전장에서 후퇴하지 않는 지휘관을 선호했다. 그는 이런 원칙 하에 한미 지휘관들을 상대했고, 이를 따르는 장군을 높이 평가해 중용했다.

그렇지 못한 장군은 미군 장성이라도 냉담했다. 그는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전쟁을 잘하는 맥아더·밴프리트에게는 악수할 때 최대 호의 표시로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는 맥아더가 해임될 때, 내 심정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군인이라며 아쉬워했고, 밴프리트가 떠날 때는 부부를 초청해 위로했다. 반면 워커 장군은 버릇없는 친구라고 말했다.

이는 워커가 한국군은 왜 잘 싸우지 못하느냐며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전쟁 동안 이대통령은 정치가와 군인이 할 일을 구분했다. 그는 정치적 의미가 있는 38선 돌파와 반공포로 석방은 직접 주관했으나, 군단 해체 등 군사 사항은 미군에 일임했다. 그렇지만 원활한 한미연합작전을 위해 그는 유엔군부사령관을 신설, 한국군 장성을 앉히려고 시도했다.

특히 그는 미국의 정책을 한국에 유리할 경우만 받아들여 워싱턴과 미군 사령관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렇듯 그는 불리한 전쟁환경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의 역량만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인 미군 지휘관을 아우르며 전쟁을 한국에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럼에도 미군 지휘관들은 이대통령을 ‘올드 맨(old man)’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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