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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4 09: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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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3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48>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 전사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48>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 전사
뛰어난 전공 불구 불운한 최후 맞아


6·25 때 뛰어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운했던 장군은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일 것이다. 그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작전을 지도했음에도 중공군 개입 후 38선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자동차 사고로 순직했다. 그런 탓인지 그는 군사령관으로서 리지웨이·밴프리트 장군만큼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그는 영광보다 오히려 불운·비극으로 점철된 장군이었다.

한국전쟁과 그의 첫 만남도 비극이었다. 그가 한국전선의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받고 전황 파악을 위해 한국에 온 첫날인 1950년 7월 8일 미34연대장이 천안전투에서 적 전차포에 몸이 두 동강이 나고, 천안이 함락됐다. 그해 7월 13일 대구에 미8군사령부 지휘소를 개설하고 전쟁을 지도했으나 전황은 날로 악화됐다.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이를 사수하던 미24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됐고,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군의 후퇴는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으로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맥아더 원수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미8군사령부를 전격 방문해 “?蝸?르크·바탄 같은 후퇴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질책했을까.

그러나 워커 장군에게는 전략예비가 없었기 때문에 작전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를 더욱 난감하게 했던 것은 한국전선에 투입된 미군부대가 대부분 감소 편제된 주일미군사단이라는 것이다. 이들 사단은 3개 보병연대로 편성됐으나 각 연대는 2개 대대뿐으로 사단 전투력은 2개 연대 수준이었고, 포병과 전차부대도 사정이 이와 비슷했다.

더욱이 미군의 예상을 깬 북한군의 빠른 남진 속도 때문에 워커 장군은 한국에 도착한 미군을 바로 전선에 투입시켜 방어종심도, 차후 작전을 위한 예비대도 확보할 수 없었다. 워커 장군은 최악의 전장 환경에서 ‘가난하면서 자식 많은 흥부’가 한 끼 식사를 때워 나가듯 전선을 유지해 나갔다. 7월 말부터 시작된 미 본토증원 병력이 오면서 조금의 여유가 생긴 듯했으나 전세를 역전시키기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는 미군 1개 연대를 차출해 전략 예비대로 전선의 돌파된 지역에 마치 응급환자에게 긴급 수혈하듯 다부동과 영산돌출부와 같은 ‘전략적 공백지대’를 메워 나갔다. 그때는 군단사령부가 편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뿐만 아니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도를 수행해야 했다. 그는 지휘 폭도 넓었고 지휘부담도 컸다. 제2차 세계대전시 유럽전선에서 패튼 장군 밑에서 용맹을 떨쳤던 그에게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한국전선은 그를 ‘우리에 갇힌 맹수’로 만들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버티며 지탱했던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도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작전의 하이라이트인 서울 점령의 영광이 미10군단장 알먼드 장군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한국전선에서 알먼드 장군과 지휘권을 나눠야 하는 ‘치욕스러움’이었다. 그나마 북진작전에서 국군1사단의 평양 점령으로 겨우 체면을 유지했던 그에게 중공군 개입은 악운이자 비극의 서곡이었다.

미2사단이 궤멸적 타격을 받은 것도 이때였고, 국군2군단이 미8군 상황판에서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최대의 전리품이자 마지막 자존심이던 평양을 포기하고 38선으로 후퇴했던 것도 이때였다. 결국 그의 불운과 비극은 50년 12월 23일 전사로 종결됐다. 자동차 스피드광(狂)이었던 그는 의정부 북쪽 덕정에서 국군 트럭과 충돌해 사망했다. 미국 정부는 워커의 전공을 기려 대장으로 추서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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