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486
일 자
2007.07.23 14:24:27
조회수
2859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28>미국 참전이후 북한 전쟁수행제체 변화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28>미국 참전이후 북한 전쟁수행체제 변화

北, 전시동원령 선포 청장년 추가 징집


▲미국의 참전과 북한의 충격

미국 참전은 개전 4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승리에 도취해 있던 북한 수뇌부에 메가톤급 충격이었다. 미국의 개입 여부는 6•25 이전부터 전쟁 최종 승인권자인 스탈린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는 전쟁모의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수차례 물었다. 그때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며 있더라도 전쟁을 조기에 끝내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다.

또한 미국은 극동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지 않으며, 중국 대륙에서 물러난 후로는 더욱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개전 5일 만에 미 공군이 평양에 공습을 단행하고, 1주일 만에 지상군이 참전하자 북한 지도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즉, 북한은 미국과의 새로운 전쟁을 위해 전시동원령을 선포, 최고사령관에 김일성을 추대하고 전선사령부를 설치하는 등 예기치 못한 사태에 경악했다.

▲북한 전쟁지도체제의 개편과 한계

미국 참전은 북한에 재앙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북한 지도부가 전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은 6월 29일 미 전략폭격기가 평양을 공습하면서다. 28일 서울 점령에 들떠 있던 북한에 평양 공습은 충격이었다. 더구나 미군과 첫 전투인 오산전투는 승패에 관계 없이 북한에 절망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일성은 7월 8일 이러한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다. 그는 “미국이 우리 조국(북한)과 인민을 반대하여 무력 침공을 개시했다. 그들의 무력 간섭이 없었다면 통일됐을 것”이라며 미국을 비난했다. 미군 참전 이전 북한은 전시비상사태만을 선언하고 전시동원령은 선포하지 않았다. 이는 전쟁이 북한의 뜻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으로 북한의 전쟁수행 체제는 큰 변화를 보였다. 개전 당시 북한은 민족보위상(국방장관)과 총참모장이 전쟁을 주도했다. 즉, 민족보위상이 총참모장의 보좌를 받아 전쟁을 총체적으로 지도했다. 하지만 미국이 참전하자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7월 4일 김일성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한 데 이어 5일 전선사령부를 신설하고 사령관에 부수상 김책 대장을, 참모장에 강건 중장을 임명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의 명을 받아 전선의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작전사령부로서, 이는 중공군이 개입할 때까지 작전지도본부 역할을 했다. 이 무렵 북한은 전역에 동원령을 선포하고 청장년을 추가로 징집했다. 북한의 조치는 미국의 참전에 따른 자구책이었다.

이제 전쟁은 북한이 최초 계획했던 1개월이라는 단기 결전의 승리가 멀어진 대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었던 미국과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됐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빨치산 출신이 대부분인 북한군 지도부는 소련제 무기를 앞세워 소규모 전투에 이길 수 있는 전술적 머리는 있었으나 현대전과 국제전의 특성을 지닌 6•25를 체계적으로 지도할 전략적 머리는 없었다.

이는 마치 거대한 몸집에 비해 왜소한 머리를 지닌 공룡 같았다. 이것이 북한군 지도부의 한계였고 이는 휴전까지 이어졌다. 김일성이 개전 이후 6개월간의 전쟁을 분석하고 이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한 ‘별오리회의’에서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군부의 무능을 질타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07.23]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군사편찬연구소, 국사편찬위와 협정서 체결
이전글 [국방일보]편년체 방식으로 서술한 국방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