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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17: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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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1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0>낙동강 방어선의 전사(戰史)적 의미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0>낙동강 방어선의 전사(戰史)적 의미

천연 장애물 이용한 최후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과 국군방어계획

낙동강 방어선은 1950년 7월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부산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설정한 최후방어선이다. 낙동강 방어선 개념은 6•25 전에 수립된 국군방어계획에도 있었다. 50년 3월 육군본부 작전국은 전년도 정보국이 분석한 북한의 남침위협 평가에 따라 국군방어계획인 ‘육본작명 38호’를 수립했다.

국군방어계획의 대강은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38도선에서 저지하되 실패하면 남한지역의 큰 강을 이용해 축차적인 지연전, 즉 한강선•금강선•낙동강 선에서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군방어계획은 이러한 작전개념만 있을 뿐 이들 방어선에서 수행할 구체적 부대 운용이 생략된 미완(未完)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6•25 때 워커 장군이 설정한 낙동강 방어선이 전쟁 이전 수립된 국군방어계획에 포함됐었다는 점에서 당시 군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이 우수했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의 전략적 가치와 북한군의 방책

6•25 때 국군과 미군은 천연장애물인 하천을 이용한 결전방어를 선호했다. 이는 한강•금강에 이어 낙동강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한미 연합군이 7월 한 달간의 지루한 지연전을 끝내고 북한군과 최후 결전을 도모하고자 했던 낙동강은 총길이 525㎞로 한반도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워커 미8군사령관이 천혜의 요새인 낙동강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선택한 것은 다음의 전략적 요인을 고려해서다.

첫째, 한미연합군의 병력에 비해 방어 정면이 넓다는 결점이 있으나 아군의 공세이전을 위한 기동이 용이해 도처에서 언제든지 반격이 가능한 반면, 도하능력이 빈약한 북한군에 대해 낙동강의 천연장애물을 이용할 수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둘째, 대구•마산•포항•영천•경주•밀양 등 주요 도시가 포함돼 한국인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방어지역에 이들 도시를 연결하는 환상(環狀)도로가 비교적 잘 발달돼 아군의 기동력을 높이고 병참지원 등 원활한 군수지원이 가능했다.

셋째, 낙동강 방어선의 형성•확보는 인천상륙작전과 총반격작전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얻게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총 240㎞로 미군이 낙동강 서부의 개활지 112㎞를 담당했고, 국군이 낙동강 상류의 산악지역 128㎞를 담당했다. 한미연합군이 50년 8월 1일 낙동강 방어선으로 일제히 철수하자 북한군은 아군의 최후 교두보인 부산을 공략하고자 네 가지 방책을 적용했다.

첫째는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의 동쪽에서 마산을 통과하는 방법, 둘째는 낙동강 돌출부를 통과해 밀양•삼랑진에서 미8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철도•육로를 이용해 공격하는 방법, 셋째는 경부 국도를 따라 대구를 통과하는 방법, 넷째는 경주를 거쳐 동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방법이었다. 북한군은 이들 방책 중 어느 하나가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8월과 9월 공세’를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북한군은 전차 1개 사단과 보병 13개 사단 등 14개 사단을 투입해 45일간 한미연합군을 악착스럽게 압박했다. 한미 연합군은 국군 6개 사단과 미군 4개 사단 등 10개 사단으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과 총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낙동강 방어 작전은 국토의 5%인 부산교두보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총력전으로 일궈낸 쾌거였다.

[국방일보-2007.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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