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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3 16: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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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15>중공군 참패와 전력의 한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15>중공군 참패와 전력의 한계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에 역부족


▲중공군 참전 목표 확대

중공군은 참전 이후 1951년 4월 최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 춘계공세를 개시했으나 대참패를 면치 못했다. 그들은 서울 외곽과 속사리 ~ 하진부 선까지 진출했으나 거의 재기 불능의 인적 손실을 입게 됐다. 이러한 중공군의 참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력은 처음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다. ‘중·소 비밀외교문서’에 의하면, 현지 사령관인 팽덕회는 당시 중공군의 전력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유엔군과의 정면 승부를 피할 것을 수차 주장했음이 확인된다.

중공군은 이 작전 이전까지는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도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전선이 비교적 안정화한 51년 4월의 상황은 교란전술이 통할 수 없는 국면이었다. 그러나 공산 측 정치지도부는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상정했고, 결국 모택동과 스탈린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이른바 춘계공세에서 유엔군과 정면 승부를 벌이게 됐던 것이다.

▲중공군 힘의 한계와 휴전방안 모색

중공군은 이 공세에서 전력을 쏟아 부었으나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들은 최대 80개 사단(인민군 포함)을 투입해 공세작전을 펼쳤지만,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앞세운 유엔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비로소 목표가 너무 크며 병력과 물자 지원에 한계가 있음을 직시하게 됐다. 반면 유엔군은 중공군의 주요 목표가 됐던 국군 제3군단(예하 제9사단과 제3사단)이 현리에서 패하긴 했으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을 바탕으로 즉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특히 국군이 용문산과 대관령에서, 그리고 미군이 벙커고지와 운두령에서 각각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유엔군은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됐다. 이 무렵 유엔군이 통일 의지가 있었다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해·공군의 우세, 지상군의 기갑 능력과 막강한 화력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완승을 목표로 할 경우 중국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또 소련이 개입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유엔군은 정전 수준에서 전쟁을 마친다는 입장이었다. 모택동도 참패 이후에야 비로소 “현재 수준에서는 결코 유엔군에 치명타를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고 해 팽덕회의 의견을 존중했다.

이제 중공군이 택할 수 있는 방책은 유엔군이 원하는 휴전회담에 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춘계공세 이후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를 지양하고 소규모 전투를 통해 현상을 유지하는 작전으로 전환하게 됐다. 이들은 이른바 중공군 ‘현대화 계획’에 따라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신장비로 무장하고 훈련하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지구전’, 장기전을 통한 중공군 현대화 계획이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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