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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3 15: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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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19>양측의 휴전회담 제의와 의미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19>양측의 휴전회담 제의와 의미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비화


▲ 휴전협상 제의 과정

6·25전쟁은 냉전체제 하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고 곧이어 동서 양 진영의 힘겨루기로 변모하는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비화했다. 그러나 양측은 군사적으로 격돌하면서도 이 전쟁이 세계 전쟁으로 비화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유엔은 공산진영을 설득해 평화적으로 전쟁을 중단할 방법을 모색했고, 전쟁 전 현상으로 돌아가는 선에서 전쟁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승승장구 남진하고 있는 공산군의 반대로 유엔의 제안은 번번이 무산됐다.

반면 공산군은 1950년 10월 초 남침한 북한군이 유엔군 반격에 의해 패주할 때 38도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는 ‘외국군의 즉각 철수’ 등의 조건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으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제의는 유엔군의 38도선 돌파를 지연시키며 이미 출병을 결정한 중공군의 참전 준비에 시간을 벌고자 하는 위장 평화제의였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어 51년 초에 접어들어서도 유엔의 평화 노력은 계속됐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3월 하순 유엔군이 38도선을 회복할 무렵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직접 공산군사령관 팽덕회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했으나 이 제의 역시 묵살됐다.

▲ 전선교착과 휴전협상

51년 4월부터 양측은 이른바 중공군 춘계공세와 유엔군의 반격작전에서 개전 이후 최대 결전을 치렀으며 여기에서 피아 공히 큰 인명 손실을 입게 됐다. 이후 양측은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됐고, 결국 미국이 주도한 막후 접촉에서 소련이 “전쟁 전 현상에서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한다”는 데 호응해 옴으로써 마침내 협상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협상이 성사되기까지 힘에 의한 타결 시도가 몇 차례 더 반복됐고 그 중에는 “국지적 제한 전쟁이냐 또는 확전이냐”라는 기로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에 동서 양 진영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역량을 투입했으며 남북한도 총력전을 전개했다.

이와 같이 격돌하던 전선은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끝난 51년 6월 전쟁 한 돌을 즈음해 38도선 부근으로 회귀했고 그 후 교착 상황으로 접어들게 됐다. 중공군은 춘계공세에서의 실패와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재기 불능의 손실을 입었다.

이 무렵 양측은 힘에 의한 해결 방안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됐다. 공산군은 1년간의 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전 한반도를 공산화시킬 수 없음을 크게 자각했고 유엔군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됨으로써 상호 적극 공세를 지양했다.
마침내 전쟁을 주도한 미국·소련이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의 의도를 재확인했고 이로써 양측이 이 지역에서 냉전구조의 균형을 파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게 됨으로써 휴전협상이 가능하게 됐다.<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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