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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1 1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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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22>반공포로 석방의 의미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22>반공포로 석방의 의미

교전 당사국 영토적 주권 행사


▲반공포로 석방 지시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 반공포로 석방을 구상한 것은 그들을 공산군에 넘겨 줄 수 없다는 인식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휴전협상에서 한국의 주장이 고려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제네바협정 전문을 검토해 설사 국군의 지휘권이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돼 있다 하더라도 한국은 교전 당사국으로서 영토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휴전회담장에서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된 날인 1953년 6월 8일 이대통령은 원장군의 보고를 받고 즉시 “오늘부터 모든 헌병은 헌병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고 또 그 자리에서 반공포로 석방 명령서도 하달했다. 휴전회담의 진척이 가시화되자 한국 곳곳에서는 휴전반대 궐기대회가 가열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입장으로 상당히 곤혹스러워했지만 그렇다고 회담의 진전을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시점에 한국 정부는 전국적으로 준 비상계엄령을 하달했고, 도미 중인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대장 이하 전 장병을 귀국시키고 회담대표단에서 한국 대표를 소환했다.

▲반공포로의 석방과 의미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53년 6월 9일 육군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부사령관 송효순 대령 등을 호출, 반공포로 석방계획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결정했다. 그는 거사 일을 ‘6월 18일 24시’로 결정하고 광주·마산·부산·영천·논산 각 지구별로 밀사를 선발해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급기야 3만6000명의 반공 포로가 일순간에 석방됐다. 반공포로들이 대한의 품에 안기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반공포로들이 석방되자 각 지역 경찰과 주민들이 그들을 돌보며 지원해 주었다. 이대통령은 대부분의 반공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한 사실을 보고받은 후 이날 오전 사전에 준비된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정부가 반공포로들을 석방시키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 정부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그의 자문들은 한국 정부의 행동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 사건이 휴전회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즉시 성명을 발표, 그것이 한국 정부의 단독 행동이었으며 수용소 내 미군들이 탈출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허사였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이대통령이 어떠한 일이라도 단독으로 단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것은 또 모든 국군과 군사시설이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한국 대통령이 휴전회담을 결렬시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그것을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해 준 것이었다.

비록 한국 국민의 뜻과는 달리 휴전회담이 추진됐지만 반공포로 석방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국방일보-200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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