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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7.06.18 14: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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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포커스]2007년6월호: 6·25전쟁과 국가수호정신
[국방포커스 2007년6월호 기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남정옥
6·25전쟁과 국가수호정신

6·25전쟁은 신생국가 한국에게 있어 가장 준비가 안 된
최악의 상황에서, T-34전차와 야크 전투기를 비롯한 현대식 장비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부대로 편성된 북한의 기습 남침을 받아 3년 1개월여 동안 싸운 동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국군은 모든 분야에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치른 뼈아픈 전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전 초기 북한군은 기습의 효과를 최대로 달성하였고, 국군은 개전 초기 지리멸렬한 상태를 모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6·25전쟁은 세계전쟁사 중 단일전역으로는 어느 전쟁 못지않게 인적·물적 피해가 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군이 불리한 상황과 열세한 무기체계와 장비 등 어려운 전장 환경을 극복하면서 끝내 조국을 수호할 수 있었던근원적인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는 건군과정에서 장병들에게 신념화된 국군의 건군이념, 국군 3대선서 및 국군맹세에 나타난 반공정신과 민족항쟁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호국정신에 바탕을 둔 국가수호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수호정신은 6?25전쟁을 통해 여러 가지 특징을 표출하였다.

개전 초기 국군은 가장 위협적인 북한의 전차에 대항하여 육탄 돌격으로 적 전차를 저지하는 등 국난극복을 위한 위국헌신정신(爲國獻身精神)으로 싸웠고, 낙동강 방어선전투에서는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수호를 위해 구국(救國)의 결사항전정신(決死抗戰精神)으로 싸웠다. 그리고 반격 작전 시에는 오로지 북진통일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책임완수정신(責任完遂精神)으로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돌진해 나갔고, 휴전회담 간 전투에서는 주로 가파른 고지와 칼날 같은 능선에 설치된 적의 요새화된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기 위해 수류탄을 들고 공격하는 등 촌토의 국토라도 더 빼앗기 위해 왕성한 감투정신(敢鬪精神)을 발휘하여 싸웠다.

국군이 적의 기습남침을 받고 모든 것이 불비한 조건하에서 버티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국가수호정신의 요체라 할 반공정신으로 대표되는 사상적인 정화(淨化)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군은 전쟁 이전 38도선 충돌(옹진반도와 개성)과 북한 인민유격대의 남한 침투(10회), 군내 반란 사건(제14·제6연대)을 통해 굳건한 반공사상으로 무장되었고, 이는 국시(國是)로 자리매김 되어 6·25전이라는 국가 위기를 통해 국가수호정신으로 발현되었다.

그 결과 전쟁 초기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국군은 조직적인 집단투항이나 내부반란과 같은 분열 없이 육탄(肉彈)을 산화하면서 조국수호를 위한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군이 군사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결전 성격을 띤 양자강 전투에서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집단투항함으로써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과는 좋은 비교가 되지 아닐 수 없다. 특히 6?25전쟁은 전투 및 전쟁사, 그리고 전투수행에 나타난 전개양상 측면에서 볼 때 세계전쟁사의 종합판이었다.

스파르타의 300명의 용사가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페르시아 수십만 대군을 맞아 결전을 했듯이, 6·25전쟁에서 국군은 전쟁 초기 서울과 부산에 이르는 길목에서 적의 전차 및 남침에 대해 육탄공격으로 이에 맞섰고,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을 연상케 하는 낙동강 방어 전선에서는 베르덩 전투에 비견될 다부동 전투와 같은 결사적인 방어전이 곳곳에서 수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영·불연합군의 덩케르크 철수작전, 독일점령지역의융단폭격, 태평양 전에서의 미·일 항공모함 작전, 독일점령지역의 대공습 등과 같은 작전이, 6·25전쟁에서도 인천 및 원산상륙작전, 흥남 및 장사동 철수
작전, 왜관지역 융단폭격, 동해 및 서해상에서의 항공모함 작전, 수 백 대에 달하는 전폭기들의 북한지역 대공습이 실시되었다.

또한 제1차·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싹트고 발전된 총력전 양상이 6·25전쟁에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총력전에는 15세부터 17세까지의 소년지원병과 학생신분의 학도의용군, 미군에 배속된 카투사(KATUSA), 지게부대인 노무자, 40여개에 달하는 각종 유격대,
준 군사단체인 대한청년단 및 청년방위대, 예비군 성격의 국민방위군, 여군 등 어린 소년지원병으로부터 40세에 달하는 노무자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남침공격에 온 국민은 국가수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하였다. 여기에는 전쟁 중 산화한 약14만 명의 호국영령들과 대소 전투에서 조국을 사수하다 평생을 육신에 상흔을 안고 사는 약 45만 명에 달하는 부상자, 생사마저 불명한 약 2만 5천명에 달하는 국군실종자, 그리고 어린 소년지원병에서 나이 많은 노무자에 이르기까지 국가수호정신으로 발현된 민족혼이 살아 숨쉬었기에 가능했다.

그 결과 6·25전쟁과 똑같은 반공 이데올로기 전쟁을 겪었던‘자유월남’이 베트남전쟁에서‘공산월맹’에게 패했던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국가수호를 위해 참전했던 모든 분들에게 전후 세대가 그
고마움을 표할 차례이다. 약 60년 전 멍들고 찢겨진 그 산하위에 오늘날 최대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행복한 터전을 마련해 준 그 분들에게 할 수 있는최상의 길은 그분들이 겪었던‘그 때 그 날의 참 교훈과 국가수호정신’을 민족정신의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을 자유민으로 살아남은 후세들에게 반드시 전해지도록 하고, 그 분들의 값비싼 희생과 빛나는 위업을‘일과성이 아닌 지속적인 국가차원의 사업’으로 널리 기리고 선양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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