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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2 09: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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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8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3·1운동과 한류 정신













[시론-3·1운동과 한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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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1일 정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의 장례를 이틀 앞둔 이날,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전 세계를 향해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자유민임”을 선언했다.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저항하리라는 강개한 외침은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처럼 꺾일 줄 몰랐다. 인근 파고다공원의 학생 시위로 이어진 그날의 함성은 요원의
불길처럼 아시아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실로 3·1 운동은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아시아·아프리카 약소 민족의 독립과 국가 건설에 물꼬를 튼 기폭제였다. 우리 민족은
공화 - 평등 - 평화주의라는 세계사적인 보편적 이념을 만방에 천명했던 것이며 당시 중국의 ‘민국일보’가 20여 회 대서특필했듯이
그것은 “세계 혁명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여는 일이었다.


그해 5월4일, 북경의 천안문에서 중국학생들의 구국 선언이 있었다. 3·1 운동의 첫 여파가 중국에 미친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인도 북부 암릿사르의 평화 시위로 이어져 간디가 이끄는 비폭력적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진실에의 헌신’이라는 뜻)의
서막이 열렸다. 인도 시인 타고르는 세계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한 인도 대륙을 일깨운 3·1 운동을 보고 한국을 ‘동방의 빛’이라고
예찬했다.


3·1 운동의 여파는 이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을 비롯해 미국·영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이집트 등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줬다. 3·1 운동에서 흘린 민족의 피는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15억 명의 아시아를 흔들어 깨운
순백의 경종이었던 것이다.


민족사학자 백암 박은식은 생전의 꿈인 ‘광복사’(光復史)를 간행하지 못한 채 최후의 저서가 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
운동을 조명한 바 있다. 그는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라며 3·1 운동의 정신을 세계 개조를 위한 신문화 운동의 촉진제로
인식하고, 그 동인이 ‘한국 국민성의 빙탄’(氷炭)이라고 강조했다. 백암은 갑신정변과 동학운동은 민중의 지지가 없어 실패했으나
을미의병으로부터 시작된 의병 전쟁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돼 3·1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각성된 민중의 질서 있는
운동’이야말로 창조적인 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그러한 정신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다시 한국 문화의 저력을 기반으로 전 아시아에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바로 그 징표가 한류(韓流) 열풍이다. 한류는 단순한 현대 문화의 기예적 확산이나 수출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한국의 힘, 곧 3·1
운동으로 응집된 ‘코리아 다이내믹스’와 맞닿아 있고 또 그래야 한다.


3·1 운동 87주년을 맞아 현대 한국 문화의 결정으로서 한류가, 그날 우리의 ‘나라사랑’이 전 아시아인의 민족 정신을 분출시켰듯
21세기 아시아 공동체의 번영·평화 발전을 촉진하는 또 한번의 역사 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백범 김구 선생이 그렇게 바라던 ‘문화 대국 코리아’의 미래가 그것이리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文博>


 



[국방일보-200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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