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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4 09: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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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빼앗긴 수도 3개월 만에 탈환한 전쟁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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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수도 3개월 만에 탈환한 전쟁 영웅
[국방일보-2005년 9월 28일]

9월28일은 지금으로부터 꼭 55년 전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의 최종 목표인 수도 서울이 한·미 연합군에 의해 수복된 날이다.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상륙 부대는 작전 13일 만에 전략 기지인 인천항과 김포공항을 확보한 데 이어 군사 목표이자 정치적 상징인 수도 서울을 피탈 3개월 만에 탈환했다. 또 낙동강의 한·미 연합군도 16일 총공세로 전환한 지 불과 15일 만에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완전 몰아내고 민족의 염원인 북진 통일을 바라보게 됐다.

◆20세기의 칸네 전투

때문에 전사가들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과거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군을 섬멸, 전쟁 국면을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유리하게 반전시킨 것과 비교해 ‘20세기 칸네(Cannae) 전투’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상륙 지역의 부적합, 낙동강 전선의 어려운 전투, 미 본토 증원 병력의 부족 등을 고려할 때 최악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2개 전선을 형성할 수 없는 낙동강 전선에서의 아군 병력 열세, 미 합참과 해군 지휘부의 강력한 반대, 상륙에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는 인천 해안, 병력과 상륙 훈련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륙 부대 등 모든 상황이 최악임을 맥아더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강행한 것은 승리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신, 전략적 기습에 바탕을 둔 창의성과 대담성, 단기 결전으로 10만 명의 병력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됐다.

◆전략적 식견과 경험

맥아더는 6·25전쟁에 대한 가장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해법은 상륙 작전이고, 상륙 지점으로 서울의 서측 관문인 인천을 최적의 장소로 판단했다. 이러한 착상은 40세가 넘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아오면서 별다른 취미 생활 없이 오로지 전사 탐독과 연구에서 얻은 높은 전략적 식견과 미군 역사상 유일하게 제1·2차 세계대전 때 장군으로 참전, 생생한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체득한 실전 경험에서 얻은 영감에서 나왔다.

최초 인천상륙작전 시도는 개전 나흘 만인 6월29일 한강변의 최전선을 시찰하면서부터 시작돼 지연전과 낙동강 전선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륙 작전에 대한 열정을 끌어올렸다. 그는 전선 상황과 관계없이 상륙 작전 준비를 참모들에게 지속적으로 독려했다. 그리고 합참에 대한 설득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상륙 부대에 대한 훈련과 병력 보충 방안을 강구하며 상륙군을 지휘할 상륙군단 창설 등의 난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노르망디와의 차이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시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제2차 세계대전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의 총력 지원 하에 3년간의 충분한 준비 끝에 이루어졌으나 인천상륙작전은 상륙 지역의 부적합, 합참의 소극적인 동의, 상륙 병력의 부족 등 최악의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인다.

맥아더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계획·준비 단계를 거쳐 실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했다.

아이젠하워가 주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1942년 최초 라운드업 작전으로 계획됐다가 43년 오버로드 작전으로 최종 확정돼 발전했던 것처럼 인천상륙작전도 블루하트 작전에서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이어졌으나 지원이나 내용 면에서 노르망디 작전과는 엄청난 간극을 보였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3년 동안 충분한 준비 단계를 거쳐 연합국 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 연합군의 제2전선 형성 시기가 다소 늦어질 수 있었으나 이는 적당한 시기를 골라 다시 상륙 작전을 전개하면 되기 때문에 전쟁 전반이나 군인으로서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미칠 영향은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

그렇지만 맥아더 장군의 경우는 달랐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독단으로 단행했고, 또 병력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최후 수단으로 상륙 개시일 불과 한 달 전인 8월 한국 청년 8000여 명을 긴급 징집, 카투사(KATUSA)라는 이름으로 상륙 작전에 참가할 미군 부대에 배속시켰고 그 결과 미 제7사단의 병력 절반은 카투사였다.

또 혈전이 강요된 낙동강 전선에서도 전투 병력이 부족해 240㎞의 광정면에 마치 일렬 횡대로 병력을 배치한 것과 같은 허약한 ‘종이 방어선’(paper defense line)을 형성, 적의 집중 공격을 받아 돌파될 경우 유엔군의 최후 거점인 부산 교두보가 직접 위협받게 돼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할 무렵의 전선 상황은 이처럼 어느 한 곳에서 병력을 잘못 운용하면 전 전선이 곧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예측 불허의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상륙 부대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미 해병 1개 연대와 국군 제17연대, 그리고 해병대를 차출해서 상륙 부대로 운용해야만 될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패할 경우 재기할 기회도 없었다. 맥아더에게는 노르망디처럼 다시 상륙 작전을 전개할 병력도 기회도 없었으며 작전의 실패는 곧바로 낙동강 전선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 장군이 50년간 쌓아 올린 명예와 태평양 전쟁의 승리 대가로 얻은 ‘태평양의 시저’라는 명성, 그리고 미군 현역 중 유일한 육군원수로서의 자긍심 등을 단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잃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은 오직 유엔의 목적인 국제 평화 유지와 대한민국의 존재 목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성금으로 세워진 동상

그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9월29일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정부를 대표해 최고 무공 훈장인 태극무공훈장 1호를 맥아더 원수에게 기꺼이 수여했고, 한국 국민은 57년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뒤늦게나마 성금을 거둬 상륙 작전시 지휘소로 운용된 인천의 자유공원 내에 맥아더 장군 동상을 건립해 그의 높은 군공(軍功)을 기리고자 했다.

그런데 최근 사회 일각에서 북한의 6·25전쟁 공식 간행물인 ‘조국인민해방전쟁사’에서나 볼 수 있는 좌익 성향의 편향된 역사관과 협량(狹量)한 역사 지식에서 비롯된 단편적이고 오도된 역사 사실을 확대 해석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시도를 보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는 한·미동맹 관계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은 둘째 치고라도 60년 전 해방 공간에서나 볼 수 있는 새로운 이념 대립의 재현으로 인한 국론 분열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맥아더 동상 철거 논쟁, 어떻게 봐야 하나

맥아더 장군 동상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보존과 철거를 주장하는 양측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철거를 주장하는 쪽은 “맥아더가 6·25 당시 양민 학살의 책임자”라고 주장하며 동상 철거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맥아더 동상 보존을 주장하는 이들은 “맥아더가 양민 학살을 지시했다는 주장은 팩트가 불확실한 선전”이라며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한국을 위기에서 구한 주인공”이라고 반박한다.

맥아더 동상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은 단호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지난 13일 재미 동포 간담회에서 “한·미 관계를 이런 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동상 철거 반대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장관도 “철거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지난 16일 미국 하원에 통보했다.과연 맥아더 동상 철거 논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맥아더의 공과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국제 관계를 전공한 이기택 연세대 명예교수는 “맥아더 동상 문제는 단순히 동상에 관한 논란이 아니라 결국 한·미 관계와 주한미군에 대한 인식과 평가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은 결국 주한미군 철수 주장과 연결돼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집회에 어김없이 ‘주한미군 철수’라는 플래카드가 휘날리고 있는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이교수는 “주한미군은 지난 60년간 우리 안보에 결정적 기여를 해 왔고 미래에도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한 한·미동맹 관계는 한반도 안보에 중요 요소”라며 “이런 인식의 틀에서 본다면 미국의 반한 감정을 촉발할 수 있는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지방 언론사 편집국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동상 철거 같은 것은 외교에서 굉장히 해로운 일”이라고 발언한 것도 결국 ‘한·미 관계라는 거시적 틀에서 맥아더 동상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주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안정된 한·미 관계를 위해서도 맥아더 동상은 결코 철거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동상 존폐 논쟁이 결국 외교적 문제로까지 확대된 것도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 준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 소위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할 바에는 차라리 미국으로 양도해 달라”는 서신을 우리 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지난 24일 확인됐다.워릭 모리스 주한 영국 대사도 같은 날 “맥아더 장군 동상에 대한 공격은 참전 군인들에 대한 모욕”이라며 외교관으로서는 이례적일만큼 강한 톤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은 단순히 미국 장성이라는 상징물 수준을 넘어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친 영국을 포함한 16개 참전국 군인들을 상징하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동상 철거 주장은 자칫 한·미 관계뿐만 아니라 영국 등 다른 참전국들과의 관계도 악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남정옥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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