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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8 10: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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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6·25전쟁 누가 일으켰는가!



제목 : 6·25전쟁 누가 일으켰는가!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이종판

수록 : 국방일보, 2004.06.23


일반적으로 전쟁은 선전 포고(최후 통첩)로 개전돼 휴전을 거쳐 평화협정의 체결로 종전된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 전범재판소를 열어 전쟁 책임을 명명백백히 가리고, 평화협정을 통해 적대 관계 등을 청산함으로써 법리적으로 전쟁이 종결된다.

그러나 6·25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정전 조치가 이뤄졌다. 남북한 양자가 상대방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전쟁 지도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개전 문제가 해결됐다면 최선이었겠으나 전쟁을 설계한 스탈린은 정전을 앞두고 1953년 3월, 전쟁의 최대 협력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은 76년, 전쟁의 핵심 주동자인 김일성(金日成)은 94년 사망했다.

다행히 옛 소련의 해체와 함께 공개된 소련의 극비 문서는 ‘6·25전쟁은 공산 측에서 일으켰다’는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압축해 말하면 ‘6·25전쟁 주동자는 김일성이었고, 설계자는 스탈린이었으며, 협력자는 마오쩌둥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49년 6월29일 한국에서 미군의 철수, 8월29일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10월1일 중공 정권 수립, 50년에 들어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극동방위선 선언 등 일련의 한반도 주변 정세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무력 적화 통일의 호기로 판단케 한 것이다.

50년 1월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구했고,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쉬티코프의 주선으로 소련이 제공한 교통 편을 이용, 스탈린을 찾아갔다. 50년 4월 거의 한 달 간(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을 모스크바에 체재하면서 세 번에 걸쳐 스탈린과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싸워 민중을 해방시켰고, 이제는 한반도 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됐다.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중국이 북한을 지원할 것이다. 중국과 소련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있으며, 소련이 핵을 보유하고 있어 미국 내에서도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우세하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자신감이 충만한 김일성에게 구체적인 공격 계획도 주문했다.

“작전은 3단계로 구분해 실시한다. 먼저 38도선 부근에 부대를 집결시킨다. 그 후 북한은 평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제의를 한다. 남한이 이를 거부하면 남침을 개시한다. 웅진반도를 먼저 공격해 어느 쪽이 먼저 군사 행동을 개시했는지 은폐한다. 아시아 정세에 밝은 마오쩌둥에게 의존해야지 소련의 직접 참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김일성은 “우리의 남침은 빨치산을 지원하게 될 것이며 빨치산 활동이 더욱 격렬해지면 남한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봉기에는 공산당원 20만 명이 참가할 것”이라고 소련 지도자들에게 호언장담했다.

두 사람은 50년 여름까지 북한군을 총동원하기로 결정했다. 그 시간에 북한군 총참모부는 소련 군사고문의 도움을 받아 상세한 공격 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다.

남북한 화해 분위기에 편승해 일부 병사들은 6·25전쟁이 우리 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교육을 받고 군에 입대하고 있다. 이러한 자원들에게 심층적인 전사교육을 통해 검증해 주어야 할 것이다. 민족 최대의 수난이었던 6·25전쟁을 과거의 일로만 접어 둘 것이 아니라 과거사의 깨끗한 해명이 필요하다.

인접 일본 자위대의 경우 각 교육 기관에서 전체 교육의 10%를 전사교육에 할애하고 있다. 목적은 입대한 장병에게 입대하기 전의 취약한 역사 인식을 입대 후 전사교육을 통해 보강하기 위한 것이다.

전사에는 군인으로서 필요한 전략·전술뿐만 아니라 위기 대응 능력 등을 일깨울 수 있는 무궁한 사료가 용해돼 있다.

<이종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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