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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8 11: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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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서울은 왜 쉽게 함락됐나



제목 : 서울은 왜 쉽게 함락됐나

저자 : 전장새부 선임연구원 남정옥

수록 : 국방일보, 2004.06.25


c 6·25전쟁은 5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다. 400여만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고 수십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전쟁 고아, 그리고 전 국토의 태반이 초토화됐다. 전쟁 결과가 참혹했던 것은 수도권 방위 계획의 부재 등 전쟁이 개전 초기부터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 진행됐기 때문이다.

북한은 소련과 중공의 적극적 지원 아래 중공군 소속의 한인 출신 5만 명을 인민군에 편입, 훈련시키고 전시 비상 체제로 전환하는 등 만반의 전쟁 준비를 갖춘 후 소련 고문단이 작성한 ‘선제 타격작전 계획’의 1차 목표인 서울 공략에 나섰다.

국군은 충분한 방어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전차 등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의 기습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서울의 관문인 서부 전선에서 국군을 패퇴시켰고 그 혼돈 속에서 국군은 한강교를 조기 폭파함으로써 군 조직을 스스로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강교 조기 폭파로 국군은 병력의 절반과 막대한 장비·무기를 한강 이북에 남겨 놓게 됐고 그 결과 서울은 전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개전 3일 만에 함락됐다.


전쟁에서 수도를 전략 목표로 선정한 것은 전략적 중심으로 반드시 방위해야 할 국가의 상징이자 심장부로서 전승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에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고 프랑스는 철벽 방어선인 마지노선 구축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수도의 조기 함락은 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강화조약을 맺게 한 것이 역사적 상례(常例)였다. 로마를 전율케 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격퇴한 것은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수도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7세기께 수(隋)와 당(唐)의 군사 목표도 고구려 수도 평양이었다. 군신(軍神) 나폴레옹도 러시아 침공의 최종 목표를 수도 모스크바로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시 히틀러의 소련 침공 계획인 ‘바바롯사 계획’의 목표도 모스크바였다.

실례로 프랑스는 보불(普佛)전쟁시 수도 파리가 적군에게 조기 함락됨으로써 전투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항복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시에도 프랑스는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 전차 군단이 아르덴 삼림지대를 기습 통과함으로써 결국 파리를 점령당해 항복, 전쟁에서 수도 방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6·25전쟁 때 서울도 파리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나 한강교의 조기 폭파로 함락됐다. 그때 한강교 조기 폭파 대신 서울 북방에서 최대한 적의 출혈을 강요하다가 결정적 시기에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과 서울 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뒤 한강 방어전을 준비했더라면 낙동강 방어선까지 지연전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강제 징집이나 납북 등과 같은 피해도 줄였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더글러스 맥아더가 최초 구상한 7월20일 인천상륙작전(블루 하트 작전)도 계획대로 추진됨으로써 정전을 훨씬 앞당겼을 것이다.

6·25전쟁은 분단의 고착화와 함께 값진 교훈을 남겼다.

국군은 개전 3일 만에 정예 3개 사단의 전투력을 상실하면서 준비 없는 전쟁의 가혹함을 체득했다. 또 한강교 조기 폭파와 서울의 조기 함락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도 경험했다. 이는 당시 수도권 방위 전담부대·수도권 방위 계획 부재와 병력의 축차 투입 등 군 수뇌부의 적절치 못한 대응 전략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사례를 교훈 삼아 군은 전후 ‘수도방위 9일 작전 계획’과 같은 수도권 방위 계획을 수립했다.

국가안보는 공기와 마찬가지다.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으면 그 결과는 엄청나다’는 것이 54년 전 6·25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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