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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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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중공군 4차공세와 지평리 전투 (국방저널)



제목 :
중공군 4차공세와 지평리 전투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저널,''이달의 전투사'', 2003.02월호


▲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

1951년 1월 초, 중공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자,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은 "한반도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撤軍) 할 것인가, 아니면 전력을 증강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것인가"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진영은 "한반도의 전쟁이 확대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휴전하는 방안이 최선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서 자유진영은 공산측에 "즉각 휴전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타이완의 장래와 중국의 유엔 가입 등의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라고 제안했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자유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항복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중국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마오쩌둥(毛澤東) 등 중국의 전쟁 지도부는 이제까지의 3차례 공세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잠재력을 지나치게 과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었던 호기를 스스로 버린 셈이지만, 당시 자유진영은 중국의 군사적 능력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휴전을 거부하자 마땅하게 선택 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결국 미국의 전쟁 지도부는 중공군이 공세를 계속할 경우에 대비해 한반도를 포기하는 철군계획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수립된 철군계획의 핵심내용은 "중공군이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으로부터 불과 50km 후방에 있는 금강 방어선에 진출할 경우 한반도에서 철수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정부는 알지 못했지만 중공군의 공세 여부에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 중공군을 찾아 나선 유엔군

한편 1951년 1월 12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3차공세로 야기된 원주의 위기가 수습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에서 안정을 되찾고, 부대를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꼬리를 물고 추격할 것 같았던 중공군과 북한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제는 이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1951년 1월 15일 아침, 중공군의 위치 확인과 함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1개연대 규모의 위력수색이 시작되었다. 평택에서 오산을 거쳐 수원까지 북상하면서 중공군의 반응을 탐색해 보는 것이었다. 작전 명칭은 작전부대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의 별칭을 따라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명명했다. 그런데 공격을 시작한 연대가 오산에 진출할 때까지 중공군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어서 수원에 진출했을 때 비로소 중공군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유엔군이 자신들을 깊숙이 유인한 후, 인천상륙작전의 경우처럼 후방지역에 상륙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주력을 한강 이북에 두고, 남쪽에는 소수 경계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울프하운드작전을 통해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겼던 중공군의 베일이 벗겨졌다. "중공군은 보급과 화력면에서 취약점이 많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제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미 제8군사령관 릿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1월 25일을 기해 본격적인 반격작전으로 전환하고, 한강을 향해 북진하도록 명령했다. 이른바 ''번개작전'' 즉 선더볼트(Thunderbolt)작전이다. 또한 전선의 상황이 호전되자, 유엔군의 전쟁지도부 역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2월 1일 유엔총회의 결의를 통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전열을 가다듬게 되었다.

▲ 삼마치 고개와 중공군의 4차공세

서부 지역에서 반격으로 전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수리산, 관악산 등에서 저항하는 중공군을 격파한 후 2월 10일, 한강 남쪽에 진출했다. 이제 서울의 재탈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한강을 건너려면 중부지역의 전선을 홍천 일대까지 북상시켜 서울의 동측방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홍천은 서울의 동측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 피아(彼我)에게 핵심적인 요충지였다. 따라서 중공군 역시 홍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대부대를 홍천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홍천이 중공군 4차공세의 전초기지로 부각된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 따라 홍천을 목표로 하는 ''몰이'' 작전, 즉 ''라운드업(Round Up)작전''이 2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홍천 탈환을 위한 아군의 주력부대는 미 제10군단에 속해 있는 국군 제3·5·8사단이었으며, 미 제23연대가 서측에서 지평리로 진출했다. 이때 횡성-홍천 축선을 따라 공격하는 주공(主攻)은 제8사단이었다. 이들이 홍천을 점령하려면 횡성과 홍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삼마치 고개를 돌파해야 했는데, 중공군 역시 삼마치 고개의 방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3개사단의 공격은 2월 10일까지도 진척이 없었다.

아군의 공격이 저지되자, 중공군은 2월 11일 밤을 기해 예상했던 4차공세를 감행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12개사단과 북한군의 일부를 투입한 것이다.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세가 시작되자, 공격이 저지된 국군부대들은 용전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특히 중공군의 주력이 투입된 삼마치고개 일대의 국군 제8사단은 중공군의 공격 4시간만에 소부대 단위로 분산되어 버렸으며, 제5사단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에 따라 국군 부대들을 지원하던 미군부대들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피해를 입은 부대들이 원주까지 철수했다. 그 결과 미 제23연대가 배치되었던 횡성 서측의 지평리가 돌출된 견부진지로 남게되었다.

▲ 4차공세의 승부처가 된 지평리

중공군의 4차공세로 인해 삼마치 고개 및 횡성 일대의 부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원주로 철수하게 되자, 제10군단은 지평리의 제23연대를 철수시켜, 여주-원주를 잇는 지역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령관의 생각은 달랐다. 즉 지평리의 미 제23연대가 철수할 경우, 중공군의 주력이 여주-장호원-평택으로 진출한다면 8군의 주력이 포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군사령관의 판단에 따라 프랑스대대를 포함, 4개대대로 편성된 미 제23연대는 지평리 일대에서 직경 1.6km의 원형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기로 했다.

한편 국군 2개사단을 격파한 중공군은 지평리에 고립된 제23연대를 격파하기 위해 2월 13일 밤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지평리에 연대규모가 배치된 사실을 확인한 중공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4개연대의 병력을 투입하여 일거에 제23연대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덤볐다. 제23연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막강한 화력으로 응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밀려오는 파도처럼 계속되는 중공군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일부진지가 돌파되고, 중공군의 일부가 진지 내부에 돌입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서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날인 2월 14일 밤이 되자, 중공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3연대의 장병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격을 육탄으로 막았다. 한편 군단에서는 고립된 제23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2월 13일, 제5기병연대를 증원부대로 투입했다. 그리고 이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2월 15일, 제23연대와 연결할 수 있었다. 반면 아군의 증원부대가 투입되자, 사기가 떨어진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2월 15일 밤을 이용하여 스스로 철수함으로써, 지평리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중공군 4차공세와 지평리 전투의 의의 및 교훈

중공군의 4차공세는 이전까지의 3차례 공세와는 달리 중부의 산악지역에서 감행되었다. 이는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포위기도를 봉쇄함과 아울러 아군의 화력과 기동력이 제한된 산악지역에서 국군부대들을 우선적으로 격파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중공군은 국군 제5·8사단 등 2개사단 규모의 부대를 격파하는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지평리에서 미 제23연대에 의해 저지됨으로써, 전략적 승리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지평리 전투와 울프하운드작전 사례는 "연대규모의 작전도 경우에 따라 전장의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 제27연대의 울프하운드작전이 중공군의 베일을 벗겨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전과 확대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화력으로 격파하고 승리한 유엔군 최초의 방어전투였다.
한편 제23연대는 3일동안 4배가 넘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52명의 전사자와 259명의 부상자, 42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연대는 부상당한 연대장 프리만(Paul L. Freeman) 대령이 후송을 거부하고 끝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등 전 장병이 혼연일체가 되어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반면 지평리에서 미 제23연대에 의해 사살된 중공군은 포로 79명을 포함하여 5,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때 포로가 된 중공군의 진술에 의하면 지평리에 투입된 중공군은 5개사단에서 1∼2개 연대씩 차출하여 총 6개연대가 투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 6개 연대는 통합적으로 운용되지 못하고, "각 부대 자체의 계획에 따라 중대급 부대를 반복적으로 투입했다"고 한다. "전투력을 전장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중된 전투력이 통합적으로 사용될 때, 즉 집중(集中)이 지휘통일(指揮統一)과 결합될 때 비로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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