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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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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중공군 5차공세 좌절시킨 결정타 (국방일보)



제목 :
중공군 5차공세 좌절시킨 결정타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일보, 2003.04.19


1951년 3월15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꼬리를 물고 진격을 계속하면서 38선을 돌파, 임진강~전곡~화천~양양을 연하는 캔자스(Kansas)선까지 진출하게 됐다.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전장상황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4월22일 오후가 되면서 곳곳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됐고 밤이 되자 대대적인 공세가 펼쳐진 것이다. 이른바 중공군 제5차 공세(4월 공세)의 시작이었다.

총 30개 사단을 투입한 공산군의 공세는 기동력·화력이 비교적 열세한 한국군을 먼저 돌파, 후방으로 진출한 후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코자 했다. 이로 인해 서부지역의 국군 제1사단이 파평산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이 설마리 일대에서 최대의 혈전을 벌였고 중부지역의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했다.

파평산의 혈전

국군 제1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문산~파평산 일대에서는 22일 오후 8시를 전후해 중공군 2개 사단이 사단의 전 정면에서 임진강을 도하, 공격을 감행했다. 사단은 임진강의 장애물 효과를 최대로 이용, 적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주력했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로 일부 병력의 도하를 허용하게 되고 우측의 영국 제29여단 지역으로 도하한 중공군이 사단의 우측을 위협했다.

23일 날이 밝자 사단은 지원된 항공기와 포병화력을 집중 운용, 30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그들의 공격 기세는 현저히 둔화됐다. 그러나 밤이 되자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이 재개됐다.

제1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정면돌파가 불가능해진 중공군은 고랑포에서 도하한 1개 사단으로 파평산 정면을 공격하게 하고 새로 투입된 1개 사단을 전방연대의 전투 지경선인 두포리~법원리 축선으로 진출시켜 전선을 분할함으로써 파평산은 고립되고 말았다.

사단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다행히 24일 날이 밝았다. 사단은 또다시 항공기 및 포병화력을 집중, 돌파구 내 적을 격파함으로써 돌파된 방어 지역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 3일째인 24일 밤이 깊어지면서 또다시 파평산 일대의 방어 진지가 돌파되고 말았다.

25일 날이 밝자 사단은 주간 역습으로 파평산 일대의 주 저항선을 회복하려 했으나 적은 북한군 제1군단(3개 사단)을 추가 투입,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역습은 실패하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다. 이때 갑자기 전방에서 요란한 총성과 함께 확인되지 않은 병력이 소하천을 따라 접근해 왔다. 인접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의 D중대원 40명이었다. 얼마 전 유엔군의 항공기로부터 “영국군 병력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탈출해 남하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을 용이하게 식별해 보전협동으로 구출할 수 있었다.

한편 국군 제1사단이 글로스터 대대의 장병들을 구출하고 있는 동안 중공군은 전방연대의 후방을 차단하려 했다. 다행히 25일 정오쯤 군단의 철수명령이 내려져 국군 제1사단은 3일간에 걸친 피의 공방전을 종료하고 금촌·문산 사이의 월롱산~부곡리~삼방리를 연하는 선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설마리 고립방어 전투

국군 제1사단의 우측에는 영국군 제29여단이 마지리~도감포 간을 방어하고 있었고 이들의 맨 좌측 설마리~감악산 일대는 글로스터 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된 22일 오후 10시쯤 글로스터 대대 정면으로 중공군 1개 사단의 주력이 집중적인 도하공격을 감행했다. 대대는 매복부대의 집중화력·포병화력을 운용, 적을 격퇴했으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인해전술로 많은 피해를 입고 23일 새벽 적의 도하를 허용하고 말았다.

23일 먼동이 트면서 유엔군의 항공폭격이 개시되자 적은 접촉을 단절하고 숲과 계곡으로 잠적했다. 이 사이 대대는 감악산 전방 설마리 일대에 전면 방어 진지를 편성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집중공격이 여단의 전 지역으로 계속되자 글로스터 대대의 인접대대들이 중공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한 데 이어 여단·사단이 실시한 역습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글로스터 대대는 적 진지 한가운데에 고립됐다.

24일 새벽부터 중공군은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한편 사단에서는 24일 날이 밝자마자 적중에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필리핀 대대·전차 1개 중대로 적진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오후에 계속된 공격도 실패했다.

24일 오후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여단장은 사단장에게 글로스터 대대의 야간철수를 건의했다. 그러나 사단장은 “야간 철수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25일 아침 역습부대를 투입, 구출할 때까지 현 진지를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사단장의 명령으로 글로스터 대대는 24일 밤에도 1개 사단을 추가 투입, 총공세를 펼치는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물리쳤다.

한편 25일 오전 5시 군단장의 `전 병력 후방 철수'' 명령을 접수한 사단장은 글로스터 대대가 구출될 때까지 철수를 보류하고 역습을 계획했다. 그러나 가용 수단이 없었으며 오히려 사단이 포위될 위기에 빠졌다. 이에 여단장이 나섰다. 여단장은 글로스터 대대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철수하거나, 불가능하면 투항하는 양자택일의 결정권을 대대장에게 위임한다”라고 명령했다.

여단장의 명령을 접수한 대대장은 중대장들을 모아 놓고 “부상병과 함께 잔류하겠다”고 선언, 중대 단위로 철수를 지시했다. 그러자 군목(軍牧)과 군의관·위생병은 부상병 50명과 함께 잔류를 자원했다. 이에 따라 25일 오전 10시쯤 A중대를 선두로 남쪽을 향해 철수를 시작했다. 반면 이들의 철수를 엄호한 후 맨 마지막으로 철수한 D중대는 이들과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이동, 다시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남진해 탈출에 성공했다.

파평산·설마리 전투 의의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수복 이후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계속 반격작전을 실시하는 동안 후퇴를 거듭하던 공산군은 자신들의 한계로 인해 유엔군과의 휴전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 등 공산군의 전쟁지도부는 유엔군에 밀리고 있는 상태에서 협상에 응할 경우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국면 전환을 노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시된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사창리에서 국군 제6사단을 격파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서부 지역에서 파평산의 국군 제1사단과 설마리의 영국군 제29여단의 선전(善戰)으로 `의정부로 진출해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전역우회(戰役迂回) 계획은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파평산·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의 제5차 공세를 좌절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후일 중공군은 자신들의 패인(敗因)에 대해 `의정부로 진출해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던 제64군이 파평산에서 국군 제1사단의 저항으로 주진지를 신속히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영국군 제29여단은 이때 전투에서 전체 병력 중 3분의 1을 잃었으나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으로 동두천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중공군을 3일 동안 고착·견제함으로써 중공군의 기도를 저지하고 군단 주력부대의 안전철수와 차기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로써 설마리 전투는 미 제23연대의 지평리 전투와 함께 고립방어 전투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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