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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1 13: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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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베트남전쟁 파병을 통해 얻은것과 잃은것은 무엇인가?



제목 :
베트남전쟁 파병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저널,''이달의 전투사'', 2003.06월호


역사(歷史)의 해석은 고정불변이 아니며, 시대에 따라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국방홍보원은 한국군 베트남 철수 3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필자가 자문 및 해설자 역할을 맡아,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군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64년 9월∼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 동안 베트남에 주둔했던 한국군의 역할과 의의에 대해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한번 성찰하고, 재해석할 필요에 따라 계획된 사업인 것이다.

▲ 오늘의 한·베트남 관계

현지촬영을 위해 12월 7일, 인천공항에서 탑승한 하노이행 비행기는 불과 5시간만에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입국장을 통과하면서 느낀 첫인상은 우리나라 여름의 끝자락과 같은 날씨에 푸른 나무가 청초함을 더해주는 시원한 분위기였다. 또한 어렸을 때 보았던 시골 도회지와 같은 정경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국내 촬영시 참전용사 한 분이 "내가 하노이에 가면,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던 우려의 말씀이 생각나 헛웃음이 나왔다. 가는 곳마다 고향 마을과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참전용사의 우려가 이해되기도 했다. 그분들이 파병되어 싸울 때 하노이는 적국의 심장부였다. 따라서 당시의 강렬했던 인상이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노이에서 두 번째 밤을 맞으면서 자신감을 갖게된 우리 일행은 호떠이(西湖 : 하노이 북쪽의 가장 큰 호수) 부근에서 숙소인 호텔까지 3Km 정도의 거리를 통역도 없이 걷기로 했다. 그렇지만 일행은 하노이에 대한 지리적 감각이 없었던 탓에 9차례나 묻고, 묻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리 행인에게, 또는 가게에 들러 호텔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내보이며 길을 물을 때마다, 우리의 보디랭귀지를 "알아듣지 못하겠다"라고 하거나, 또는 "모르겠다. 바쁘다"라고 답변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거리에 나와 손짓과 발짓을 다해 ''디탕, 제파이(직진, 우회전)''를 외치며, 우리가 미안할 정도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다.

하노이는 물론이고, 한국군이 싸웠던 중부지역 어디에서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한국군에 대한 나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과거를 덮어두고, 현재와 미래를 위해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증진시켜야 한다"라며, 힘주어 말했다. 또한 시내에는 ''ㅇㅇ 백화점 고객버스'' 등 한국어로 표기된 한국산 중고 버스와 자동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으며, 한집 건너면 한국상품을 소개하는 간판들을 볼 수 있었다.
1개월을 조금 넘기는 결코 길지 않는 여정이었지만, 한국군의 활약상과 함께 베트남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과 잠재적 가능성을 엿 볼 수 있었다. 또한 과거 양국의 적대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를 통해 진정한 동반자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베트남전쟁 파병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막연하게 ''미국의 압력에 의해 파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생각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 없으나, 정확한 평가는 아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한국군을 파병하려는 시도는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되어 왔으며, 오히려 미국이 한국의 남북대치 상태를 우려하여 이를 저지했다. 따라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원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가 국익(國益)을 위해 적극적으로 채택했던 정책이었다.

한국군을 파병할 당시 내세운 명분은 "6.25전쟁시 도와준 자유우방의 은혜에 보답한다. 동남아의 공산주의 팽창을 방치할 경우, 그 여파가 한반도에 미치게 될 것이므로 베트남은 한국의 제2전선이다. 미국과 동맹체제를 강화한다" 등의 논리였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미국과 유대를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의 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방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했던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첫째 미국과 유대를 강화하면서 신의를 바탕으로, 자유진영 중심의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을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내 세울만한 국력이 없었던 한국이 1966년 6월, 아스팍(ASPC) 즉 아시아태평양 협력기구를 탄생시켜 아·태(亞·太) 지역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아스팍이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한국이 주도하는 국제기구를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파격적인 것이었던 만큼, 파병이 그 같은 계기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둘째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자주국방의 기틀을 조성할 수 있었다. 한국이 파병 조건으로 제시하였던 M16소총 공장건설을 시작으로 오늘날과 같은 방위산업의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또한 게릴라전의 경험 등 한국군의 전투경험도 빼어놓을 수 없다. 베트남에서 소부대 전투기술을 습득한 장병들이 휴전선에 배치되면서부터 북한의 도발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셋째 오늘날과 같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파병 기간 중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와 대미수출, 그리고 파병된 장병들의 국내송금, 베트남의 전쟁특수를 이용한 국내기업과 근로자의 진출 등에 따라 직·간접적으로 총 50억불에 가까운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베트남 파병과 관련된 외화수입을 한일협상의 결과와 비교해보면 그 천문학적 규모를 곧 알 수 있다. 즉 36년간에 걸친 일본의 지배와 장기간의 협상을 통해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한국정부가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이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정부는 전후 복구와 경제적 도약을 위해 1962년부터 5년 단위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역점을 두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막대한 외화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1963년도의 총 수출은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9,000만 달러에 불과 했기 때문에 IMF 사태와 같은 외환위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일협상과 베트남 파병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고단위 처방이었던 셈이다.

반면 파병으로 인한 부정적인 면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한국군의 파병은 베트남전쟁을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비난하는 제3세계 비동맹 그룹으로부터 소외되어, 대미의존도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미군의 용병이었다"라는 명분론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군의 파병은 북한을 자극해, 1968년 1월, 김신조 일당에 의한 청와대 기습사건,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동년 11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준전시와 같은 도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남북의 불신과 적대적 감정은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5,000여명의 전사자와 11,000여명의 부상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참전용사들이 고엽제의 후유증과 관련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등의 인적 손실이다. 아울러 베트남 민간인 피해와 관련된 일부단체의 ''양민학살'' 주장도 인도적인 측면에서 부담으로 작용했다.
매사가 그렇듯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역시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긍정과 부정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같은 표면적인 효과보다는 내면적인 영향을 보다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우리민족의 진취적 기상을 되찾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高句麗) 시대 우리 민족은 만주까지 지배하는 진취적 기상을 가졌으나, 신라통일 이후부터 한반도에 갇혀 수구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고구려 패망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진출 기회를 만들었으며, 이어서 중동(中東) 진출과 세계화의 계기가 되어 민족의 기상을 되찾게 한 것이다.
둘째 대미 관계를 협상의 관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미 양국은 안보동맹을 체결했으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협상을 계기로 미국이 만들어준 틀에 안주하지 않고, 국익에 부합된 실리외교를 마음껏 펼침으로써 우리의 외교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수립한 것이다.
또한 국군의 전평시 작전권이 유엔군사령부에 위임되어 있는 상황하에서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한국군이 협상을 통해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한 사실은 국가의 위상과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던 쾌거였다.

▲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의 과제

미국과 영국이 주도했던 이라크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세계 각국은 이라크의 전후복구사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리정부 역시 제마부대(의료지원단)와 서희부대(건설지원단)를 파병하여, 이라크의 전후 복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은 인도적 차원의 순수한 비전투부대로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던 전투부대와는 그 성격과 명분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파병된 한국군은 인도적 차원의 활동을 통해 국익(國益)을 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군은 이라크 주민을 돕는데, 우선적으로 운용되어야 하며, 새로 수립될 이라크의 민주정부와 인도적인 유대관계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양국의 우호관계를 중진 시키는 교량적(橋梁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은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사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파병의 부정적 요소를 미연에 예방하고, 긍정적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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