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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06 09: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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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정전 50년, 또 다른 전쟁



제목 : 정전 50년, 또 다른 전쟁

저자 : 군사편찬연구소장 하재평

수록 : 전우신문, 2003.07.15


1. 희미한 군사분계 표식판

1953년 7월 27일 10시, 군사정전협정이 발효된 이래 50년 동안 남·북한 군인 130여만명이 이를 준수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인원만 해도 한국군 496명을 비롯하여 미군 221명 등 7백여명에 달하고 있다. 비무장지대(DMZ)내에 500m 간격으로 설치된 1,292개의 군사분계선의 표식판은 남북분단의 현실을 잊은 듯, 비무장지대의 능선과 계곡, 그리고 산야를 완전히 변화시킨 무상한 세월의 흐름 속에 희미한 잔해만 남기고 있다.
이처럼 군사분계선은 평소 세인(世人)들의 뇌리 속에는 잊혀진 망각의 존재처럼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냉전의 유산''으로 분명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실체이기에 오늘도 한국민은 전략적 중심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을 생각하며, 한반도에서 ''항구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는 정전협정이 계속 준수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233회의 전투를 치른 한국전쟁은 반만년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대의 피해를 안겨준 전쟁이었다. 특히, 남북한 모두에게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뼈아픈 전쟁의 상흔과 함께 흉물스런 휴전선만을 안겨다 준 결과 없는 전쟁이었다.
당시 정전회담 과정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50년간의 엄청난 국제정세의 변화속에도 결코 변하지 않은 것은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국면의 지속이다. 과연 당시와 비교해서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졌는지에 대한 대답을 결코 주변국에게 돌릴 수는 없으며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이 플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2. 정전협정의 직접적 배경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4월 초 38도선 북방 10Km을 연하여 설정된 캔사스 선까지 점령하였으며, 철의 삼각지대의 저변을 연결하는 와이오밍(Wyoming)선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미국은 대한(對韓) 정책을 수정하여 ''적절한 휴전 장치하에 전쟁을 종결하고 전쟁전의 상태로 복귀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은 적에게 충분한 피해를 가하여 적들로 하여금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제한된 작전을 전개하였다. 미국은 4월 11일 휴전협상 제안에 마찰을 빚은 맥아더 원수를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대장을 임명하였으며, 신임 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에게 4월 22일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에 관한 새로운 지시''를 하달했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51년 5월 새로운 대한(對韓)정책을 수립하였고, 이에 미 합참도 유엔군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였다. ①적절한 휴전협정으로 적대행위를 종결한다. ②어떠한 경우에도 북방 경계선 남쪽의 전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수립한다. ③한국에서 외국군의 단계적 철수를 가능하게 한다. ④북한의 새로운 침략을 격퇴할 수 있도록 한국군의 충분한 전력 증강을 허용한다. 이처럼 미국은 종전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휴전으로 끌고 오게 하는 제한된 공격작전''을 수행토록 하였다.

한편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4차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통해 서울을 점령하고 최대 37도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유엔군의 섬멸과 축출에는 실패하였다. 오히려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게 되어 1951년 3월말에는 38도선 북쪽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약 2개월에 걸쳐 와해된 전력을 재정비한 후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목적으로 두 번에 걸쳐 춘계공세를 단행하였다.

먼저 1951년 4월 하순에는 서울 점령을 목표로 중서부전선에서, 5월 중순에는 중·동부 전선에서 국군 주력의 섬멸을 목표로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공산군은 전과도 없이 오히려 8만 5천여 명의 막대한 인명 손실만 입었으며,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 유엔군의 화력전술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중공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이 유엔군의 현대화된 장비를 압도할 수 없으며, 당시 그들의 군수지원 능력으로는 공세작전을 7∼10일 정도밖에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춘계공세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중공은 5월 공세를 예정보다 앞당겨 종료하고, 장기작전을 준비하여 미군을 섬멸하고, 조선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정하였으나, 군사력 한계가 노출된 상황에서 미국의 휴전제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미국의 종전정책

미국의 종전정책은 미 국가안전보장문서 NSC-48/5에 수록되었으며,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궁극적으로 통일된 자주·민주국가의 건설에 있으나, 한국의 영토를 38도선 이북으로 조금이라도 확대된 상태에서 적절한 휴전협정으로 전투행위를 종결짓고, 그 후 적당한 시기에 비(非) 한국군은 철수함과 아울러 북한의 재침에 대비하여 한국군의 전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이 종전정책을 채택하게 된 배경에는, 첫째, 미국은 한국전쟁을 전면적으로 지속하려면 20만명의 정규군이 더 필요하게 되고, 단순 추가 비용만 해도 9억 달러의 예산소요가 필요한데, 이는 미 의회에서 통과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미군의 인명피해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1951년 6월말 미군은 전사망자가 21,300명이고, 부상이 53,100명이며, 실종 및 포로가 4,400명으로 모두 8만명의 인명피해를 입고 있었다. 셋째,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전쟁 이전 상태를 회복한 1951년 6월이 휴전회담을 할 수 있는 가장 적기라는 것이다. 물론 유엔군의 해·공군력을 앞세워 평양-원산선까지 밀어 부칠 수는 있지만 이럴 경우 중국과 소련이 휴전에 응하겠느냐는 것이다.

4. 중공·북한·소련의 종전정책

중공은 1951년 춘계공세에서 입은 약 10만명의 인명피해와 화력의 절대 열세는 향후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소련이 지원하기로 약속한 60개 사단 분의 전투장비 및 군 보급품에 대해 스탈린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게 되자, 휴전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으며, 중공은 전쟁 이전 상태인 38도선만 보장된다면 휴전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1951년 전선 상황을 보고 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북한은 유엔군의 북진작전에 맞서 개입한 중공군에 힘입어 전세가 호전되긴 하였으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김일성은 전쟁 이전 남한 내 1,500-2,000명의 게릴라와 20만명의 지하당원이 봉기하여 남한을 조기에 붕괴시킬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전쟁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소련은 중공군에게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 전차 및 공군에 대한 지원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또한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감행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휴전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은 미국의 개입과 유엔군의 38도선 돌파라는 상황에 접하면서 한국전쟁을 하나의 실수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소련의 고민은 바로 확전의 가능성이었다. 소련은 한국전쟁이 미·소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5. 한국의 휴전반대 여론

한국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정전(停戰) 발의는 최초 유엔에서 나왔다. 1950년 12월 11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북한지역에서 철수할 무렵, 아시아 및 아랍 13개국은 한국전쟁 정전을 위한 ''정전3인위원회(Cease-Fire Group 3Persons)''를 설치하여 유엔에서 정전업무를 수행하게 했으나, 소련과 중공이 정전3인위원회 활동을 반대함으로써 유엔에서의 최초의 정전협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정전 움직임에 대해 한국 국회는 38도선 정전과 관련하여 1951년 6월 5일 "중공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한반도에서의 철수, 한국의 완전 자주통일, 그리고 어떠한 정전도 반대한다"는 정전반대결의안을 채택하였다. 6월 11일에는 "38도선 정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3천만의 총의(總意)로써 공산침략자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다시 주는 정전에 결사 반대한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한 공식적인 이유로, 첫째, 모든 한국민이 민족 통일을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재침이 없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셋째, 휴전에 한국정부가 실질적 대표권을 가지고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6. 미국의 정전회담 기본방침

1951년 6월 29일 트루만 대통령이 휴전교섭 지시로 리지웨이 장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산군 사령관에게 원산항에 정박중인 덴마크 병원선(病院船)에서 휴전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공산측은 1951년 7월 1일 팽덕회와 김일성은 군사행동 중지와 평화회담을 수락하며, 회담 장소는 덴마크 병원선이 아닌 개성에서 1951년 7월 10일부터 7월 15일 사이에 개최할 것을 제의하여 왔다. 유엔군사령관은 공산측의 정전회담 제안을 수락하면서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앞서 7월 10일 미국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정전회담 기본방침을 하달하였다. ① 미국의 군사적인 주요 관심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 중지·전투재발 방지의 보장·유엔군의 안전보장에 있다. ② 휴전을 추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군사적인 협정을 맺는 일이다. ③ 공산군과의 협상은 순전히 군사적인 문제에 국한되어야 한다. ④ 휴전 조건의 구체적 내용으로는 군사정전위원회를 쌍방 동수로 구성하고, 휴전선은 쌍방이 점령하고 있는 접촉선을 기준으로 결정하며, 20마일 폭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 또한 포로는 1대 1 교환을 기본으로 한다.

이와 같이 미국 정부가 유엔군사령관에게 내린 기본 방침을 분석해 보면, 적대행위를 중지한 상태에서 군사협정을 맺는데 따른 4가지 휴전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휴전조건에는 군사정전위원회 설치와 포로문제 교환방식, 그리고 비무장지대와 설치와 같은 정전협정에 포함된 주요 내용을 언급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엔군수석대표에 임명된 조이 제독은 최초 9개 항목의 회의 의제를 가지고 공산군측 대표와 의견을 나누었다. 주요 내용은, ①회의 의제의 채택, ②비무장지대에 대한 협정 ③군사정전위원회의 구성, 권한 및 기능, ④군사감시단의 구성과 기능, ⑤전쟁포로에 관한 협의사항 등이다.

한편 한국군 초대 대표 백선엽 장군은 정부와 국민 모두가 휴전을 원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대표에 임명된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는 우선 미군측과 협의를 통해 한국 대표의 입지 강화에 노력하였다. 첫 번째가 회담 불참을 통보하여 한국군 대표에 대한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회담장에서 잘못 통용되고 있는 한국의 영문표기를 ''남한(South Korea)에서 대한민국(ROK)"으로 정정케 하였고, 세 번째가 회담 진행상황을 한국군에 통보할 수 있는 공식채널을 수석대표 조이 제독에게 요청하여 정례화 함으로써 내용을 알 수 없었던 한국 정부 및 군 수뇌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7. 소련의 정전회담 기본방침

공산측의 정전협상 책임은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있는 중공의 모택동에게 있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협상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크레믈린의 충고를 수시로 경청했다.
따라서 공산권의 정전회담 지침도 모택동이 미리 작성하여 스탈린에게 보고한 후 스탈린의 지침을 받아 결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1951년 7월 3일 모택동은 회의 전에 정전회담에 필요한 의제를 선정하여 스탈린에게 보고하였다. 주요내용은, ①모택동 제안: 쌍방은 포격중지 명령을 동시에 내려야 한다. 포격중지 명령이 내려진 후 쌍방은 즉각 포격을 중지해야 한다(스탈린 동의). ②모택동 제안: 쌍방 육해공군은 38도선에서 10마일 물러나야 한다. 38도선에서 남북으로 10마일의 완충지대를 설치한다. 완충지대의 비군사적 관리는 1950년 6월 25일 상황과 동일하다(스탈린 동의) 등이다.

이와 같이 스탈린과 모택동은 회담에서 그들이 관철시킬 내용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거론하며 장단점을 분석하고 있었다. 결국 공산측 정전 대표는 이 지침의 범위 내에서 회담할 수 밖에 없으며, 회담 중 문제가 되었던 군사분계선 획정(劃定) 문제와 포로교환 방식이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쌍방의 지침이 처음부터 상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회담을 위해 협상 전문가인 외교부 부부장 이극농(李克農)을 북한에 파견하여 김일성과 회담에 관한 문제를 사전 논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실질적인 정전회담 대표는 스탈린-모택동-이극농의 지시를 받은 북한 남일은 앵무새처럼 결정된 방침이 관철될 때까지 되풀이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8. 정전회담 주요 의제 합의와 협정 조인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쌍방이 정전협정에 조인하기까지 만 2년간에 걸쳐 본회담 159회를 비롯하여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담을 실시하였다. 공산측은 정전성립과 동시에 다음 3가지 사항을 주장하고 나섰다. 38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하고 남북 각 10㎞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할 것, 포로교환을 협의할 것, 단기간내에 전 외국군대를 철수시킬 것 등이었다.
회담은 공산측의 기자단 개성출입 문제와 외국군 철수문제 고집으로 진전이 없다가 1951년 7월 26일 제10차 회담에서 양측은 5개항의 의사일정에 합의하였다. ①의제의 선택은 양측이 크게 무리 없이 해결을 보았다. ②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 설정 문제에서, 군사분계선은 조인시 접촉선으로 하고, 비무장지대 폭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 각각 2Km씩 4Km로 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③ 정전감시 방법 기능문제는 정전협정 발효후 24시간 이내 적대행위 중지, 쌍방 무장부대는 정전협정 발효후 72시간 이내 철수, 쌍방 무장부대는 협정 발효 5일 이내 상대방 연안에서 철수 등에 합의했다. ④가장 논란이 많았던 포로교환문제는 정전협정 성립후 2개월 이내 쌍방 포로교환, 직접 송환하지 않은 쌍방 포로의 귀국을 위해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 설치 및 중립국으로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인도 등 5개국 지명, 송환 거부포로의 중립국위원회 이관 등에 합의했다.

한편 최초 정전협정 조인에는 유엔군사령관인 클라크 장군과 북한의 김일성, 그리고 중공의 팽덕회가 판문점에 함께 참석하여 서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산측이 당일 조인식장에 한국군 대표의 입장 불가와 취재기자들을 배제하고 대신 사진기자를 양측에서 각각 10명씩으로 제한하자는 제의에 클라크 장군은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쌍방 최고사령관 대신 쌍방 수석대표가 서명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 유엔군 수석대표 미 육군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수석대표 북한군 남일 대장이 들어왔다. 양측 수석대표는 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으로 된 협정문서 9통과 부본 9통에 각각 서명하였다.

이로부터 3시간 후인 13 : 00시 문산에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16개국 참전 대표들이 배석한 가운데 정전협정에 확인 서명을 하였다. 한편 김일성도 이날 오후 10시에 평양에서 서명하였고, 팽덕회는 다음날인 7월 28일 오전 9시 30분에 개성에서 서명함으로써 정전조인 절차는 모두 끝났다. 이로써 3년 1개월 2일, 1129일간 지속된 한국전쟁은 정전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9. 정전협정체제 변천과 장성급 회담

정전협정 체제는 발효된 후부터 50년간에 거쳐 4번의 변화가 있었다. 제1기는 1953년 7월부터 1991년 3월까지(38년간)의 기간으로 정전 직후부터 유엔군측 정전위 수석대표로 미군 장성이 임명되었고, 정전협정 체제가 최초 합의된 내용으로 온전하게 운영되었으며 459회에 걸친 정전위원회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제2기는 1991년 3월부터 1994년 4월까지 약 3년간의 시기다. 이 시기는 한국군 장성이 정전위 수석대표로 임명된 후 공산측의 거부로 정전위 본회의가 열리지 못했던 기간이다, 단지 본회의 대신 양측 대령급 회의인 비서장 회의로 군사정전위원회 임무를 수행했다.

제3기는 1994년 4월부터 1998년 6월까지 약 4년간의 시기다. 이 기간 중 북측은 1994년 5월 24일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룰 설치하였으며, 중국 군정위 대표단 철수 및 폴란드 중립국감독위원회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따라서 유엔사측의 정전위원회만 존재하는 반쪽뿐인 정전협정체제로 바뀌었다. 이후 북한은 정전상태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 미·북 장성급 접촉을 제의하였다.

제4기는 1998년 6월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써 유엔사측과 북한군간의 장성급 회담이 군사정전위를 실질적으로 대체된 시기이다.

장성급 회담은 정전협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군사정전기구이다. 이는 북한이 1991년 3월 25일 유엔사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에 한국군 장성을 임명한 이후 군정위 본회의 참여를 거부하면서 군정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요구로 설치된 군사정전위원회가 그 역할을 대체하면서 운영되고 있다.

1998년 6월 23일 열린 제1차 회의는 북한 유고급 잠수정의 서해상의 영해 침범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측은 여전히 정전협정 무력화와 미·북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상투적인 주장을 변함없이 내세우고 있었다. 당시 참석 인원은 유엔사측은 부참모장, 합참 대표, 군사정전위 영국 대표와 태국 대표 등 4명이 참가했다. 여기에서 한국의 합동참모본부 대표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과거와의 큰 차이점이었다. 그 결과 장성급 회담은 1998년 6월부터 2002년 9월까지 모두 14차례 개최되었다.

10. 정전체제하 유엔사의 기능 강화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회담이었다. 정전협정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평화조약''이나 ''강화조약''과 같은 성질이 아니라 적대행위를 일시적으로 정지(停止)시키는 한시적인 협정에 불과하였다. 그 결과 전투는 일단 멈추었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북한은 정전50년 동안 무려 430,917건에 달하는 정전협정을 위반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50년 동안 정전체제를 부인하는 발언과 행동을 2가지로 집약하면, 첫째는 정전협정을 이행여부를 감독하는 기구인 유엔사의 권위 및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두 번째는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현 북한 체제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으려는 속셈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법적·제도적 기반은 모두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듯 50년이 지난 지금 정전협정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첫째, 협상장소의 선택이 전쟁의 결과를 결정한 것으로 개성에서의 회담개최의 합의는 중대한 전술적 실수이자 전략적 과오이다. 둘째, 협상자체가 또 다른 전쟁으로서 현재의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으로 설정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간과할 수 없다. 서부축선에서의 공산권의 지연전술로 개성이 확보되었고, 현지 유엔군사령관과 워싱턴 정책결정자간의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교훈이다. 셋째, 정전협정 위반시 제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유엔사측은 전쟁억지 및 위기관리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정전시 교전규칙을 제정하여 시행하는 실정이다. 넷째, 지금은 장성급 회담을 통해 오히려 한국측 대표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미측 대표가 선임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한·미측은 회담내용을 충분히 조율하여 우리의 입장에서의 협상 여건이 조성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유엔사는 한국의 안정과 평화 통일을 위해 정전협정을 이행하고 군정위를 통제·감독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왔다. 반면 북한은 정전협정 무실화(無實化)와 유엔사의 위상을 저하·책동하기 위해 유해(遺骸) 송환까지도 판문점 통과를 배제함으로써 유엔사 개입을 차단시키는 불순한 행동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유엔사는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꾸준히 강구해 나가고 있다. 참전국 연락장교단 파견국가를 계속 확대하고, 유엔군의 전·후방사(前·後方司) 교환 방문을 강화하면서 비참전국 연락장교단 참여 방안도 검토하는 등 정례회의를 통하여 다각적인 기능 강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정전협정은 군사문제이므로 정치문제가 개입되지 않도록 군의 당당한 자세가 요구되며, 현재 당면하고 있는 북한 핵 위협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유용한 시스템으로 활용해야 한다. 북한 핵 해결은 바로 평화체제 구축의 호기가 될 것이며, 이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그때까지 현 유엔사의 책임하에 있는 정전협정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북한의 전략적·전술적 태도변화만을 믿고 정전협정 체제를 파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또 다른 전쟁''으로 통칭되는 정전 50년간의 회담과정을 회고해 볼 때, 우리가 잃었던 입지를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통합된 국민의 의지를 바탕으로 남북한 군사적 힘의 균형에서 북한에 앞설 수 있는 철저한 준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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