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군 55주년, 軍의 어제와 오늘
1945년 8월15일 광복 직후의 국방경비대를 모체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은 창설됐다.
당시 ‘청년 국군’ 수준에 불과하던 군은 그동안 대내외적인 안보전환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이제는 ‘장년 국군’의 차원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21세기 최첨단 정예군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다. 1일 건군 제55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국가발전과
함께 ‘자주적 방위역량’을 확충해 온 군의 역사적 궤적을 중점별로 이슈화해 재조명한다. 〈편집자〉
■ 국군의 탄생과 建國機 구입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헌법과 정부조직법(법률 제1호)에 의거해 국방부가 설치되자 통위부의 업무가
이관됐고 국군은 경비대 시대를 마감하고 새롭게 재출발했다. 그해 11월30일 제정된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으로 육군과
해군의 편성이 구체화됐다. 이듬해인 49년 4월15일 진해에서 해병대가 창설됐고 10월1일에는 육군항공이 공군으로
독립, 국군 편성이 일단 완료됐다.
당시 국군은 정규군 외에 육군수색학교·호림부대·보국대대 등 특수부대도 갖췄지만 전력은 지상군 8개 사단에 2개 독립연대와
소규모의 해상 및 항공 전력을 구비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민 성금에 의해 훈련기(T-6)인 건국기(建國機)가 도입되면서 국군 건설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열의는 고조되기
시작했다. 50년 5월14일 전 국민의 축하 속에 여의도기지에서 건국기 헌납식이 거행됐는데 ‘건국기’란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기념하기 위한 총칭이었다. 각 기에는 민·관·군의 통합정신을 담은 정부 부처명과 각 지역의 도명이 별도의 제호로
붙여졌다.
■ 정전·야전군 창설·전후 복구
53년 7월27일 3년여를 끌던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미 간에는 혈맹을 토대로 하는 견고한 동맹관계가 형성돼 그해 10월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한·미 연합방위체제의 기틀이 마련됐다.
당시 전 국민의 결연한 휴전반대와 이승만 대통령이 보여준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실력행사로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한국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관철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상호방위조약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제의한 선견지명을
가진 백선엽 장군의 역할이 크게 주효했다.
그런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국군의 부대개편 및 현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72만 명 선에 이르던 국군을
상호방위조약의 기본 틀 안에서 주한미군의 철수와 국군 현대화를 전제로 63만 명 수준으로 재편한 것이다.
53년 12월15일 한국 최초의 야전군으로 제1군사령부가 창설됐고, 이듬해에는 후방지원을 위한 제2군사령부와 교육훈련을
전담하는 교육총본부가 창설됐다. 전쟁의 교훈 위에서 향후 육군의 구조를 결정하는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전후 국군의 복구사업도 주목할 만하다. 군은 파괴된 주거시설을 비롯해 교실 1079개, 고아원 18곳, 진료소 2곳
등 공공시설 복구에 참여했다. 학교를 설치하고 문맹자들에게 한글교육을 실시한 것을 비롯, 기본교육과 국민교육과정을
설치해 대민교육에 앞장섰다. 문맹교육은 일일 8시간씩 6주간 일정으로 국어와 셈본교육을 중점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장병의 질적 향상을 위한 기본교육 및 국민교육과정으로 중등∼대학교육을 실시했는데, 이는 단순한 군사교육 차원을
넘어 일반 및 사회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對)국민정신교육 도장화의 첫걸음이 된 시점이었다.
■ 해외파병·율곡사업·한미연합사 창설
60년대 세계적으로 냉전적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미국과 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전쟁시 참전 우방국에 대한
보답’이라는 명분 아래 국군 파병이 결정됐다. 당시 파병은 64년 비전투부대인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필두로
이듬해 한국군사원조단 파병, 수도사단(제26연대 제외)과 제2해병여단, 그리고 66년 수도사단 제26연대와 제9보병사단의
파병으로 이어졌다.
현대사에서 최초로 해외에 파병된 주월한국군은 사령부 예하에 야전사령부와 군수지원사령부를 거느린 군단급 규모였다.
73년 3월 말 국군은 당시 주한 미 제7사단의 철수와 더불어 동두천으로 이동한 미 제2사단이 담당하던 지역을 인수해
전 휴전선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전선을 전담하는 제1군사령부의 부대지휘 폭이 과도할 뿐만 아니라 수도권의
전투력 증강이 요구됨에 따라 73년 7월1일 베트남 철수병력을 골간으로 제3군사령부를 창설, 육군의 구조를 재편하기에
이른다.
이와 동시에 미군철수로 인한 한반도의 급격한 전력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이른바 ‘자주국방’이 초미의 과제로 부상했다.
당시의 전환기적 안보환경은 한편으로는 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로 다가왔던 것이다. 미국과 장기군원 계획을 수립하고
한국군 현대화 계획(71∼75년)을 추진, M-16 소총 공장을 준공하는 한편 조상들의 유비무환정신을 계승해 야심찬
전력증강사업인 율곡사업을 추진하게 됐기 때문이다.
율곡사업의 추진을 통해 M-16 개인화기는 물론 전차(M48A3∼5)와 헬기(500MD), F-5 전투기 도입, 한국형
구축함(KDX) 건조, 그리고 야포 및 한국형 전차(K-1)와 장갑차(K-200) 개발 등의 성과가 이루어졌다. 이
사업은 90년대에 21세기형 방위력 개선사업으로서 자주적 방위역량을 구축하는 핵심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그 당시 닉슨 독트린으로 시작된 전환기적 안보상황에서 우리 군이 추가적인 미군철수를 막고 오히려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와
군사위원회회의(MCM) 같은 협의체를 설치하고, 78년 11월7일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해 확고한 한·미동맹의 기틀을
다진 일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한미연합사는 한·미동맹의 확고한 결의를 입증하는 실천적 징표이며, 지난 50년 동안 냉전시대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전쟁억제와 평화유지를 위한 군사동맹의 구체적 결실이었다.
■ PKO·전방위 대비태세·21세기 新국방
90년대에 들어와 국군은 한반도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한 전쟁억제력으로서만 아니라 국제군으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정립해가는
계기를 이루었다. 우리 군은 걸프전에서 입증된 현대전의 양상과 북한의 속전속결 전략에 대비, 초전즉응태세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후방지역의 국가 및 민간 산업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97년 통합방위법을 제정한 이래 2000년 6월부터 지속적인 법령개정을
통해 입체적인 통합방위태세를 강화한 결과 강릉잠수함 침투사건이나 동해·강화도·여수 반잠수정 침투와 묵호 무장간첩 침투
등 남북 화해·협력을 틈탄 북의 도발에 즉각 대응할 수 있었다.
최근 증대되고 있는 테러위협에 대비해 국제적인 연대를 강화하면서 ‘테러대비 종합발전 계획’을 수립, 추진함으로써 2002년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에 큰 밑거름이 됐다. 평화유지활동(PKO)을 포함한 국제군으로서의 국군의 활동은
역시 국군의 발전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성취였다.
93년 소말리아에 건설공병부대 파견을 시작으로 한 국군의 국제적 활동은 현재 11개국 15개 지역에서 1300여 명이
외국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 국군은 21세기의 새로운 안보환경과 전쟁양상에
대비하고 현대 지식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신국방태세를 건설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당시 국방개혁위원회가 중심이 돼 추진한 국방개혁은 ‘선진 정예국방’을 건설하기 위한 21세기 신국방
건설의 견인차였다. 아울러 99년 2월 발간된 ‘국방기본정책서’는 우리 군의 미래 전략적 구상이며 이는 ‘국방중기계획서’에서
구체적으로 추진될 것이다.
그같은 전망 하에서 이미 K1A1전차를 비롯해 KDX-II·III 구축함과 F-X 사업, 나아가 우주항공산업의 T-50훈련기와
A-50공격기 등에 이르기까지 선진 정예국방의 결실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우리 군은 전략적·정책적 기조인 방위태세의 자주화, 국방인력의 정예화, 무기체계의 과학화, 운영체계의 합리화,
그리고 국방의 정보화가 국군의 미래상이자 국방의 미래 청사진이라는 인식 속에 세계 최첨단 정예군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백기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