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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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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6·25전쟁-6사단의 압록강 진격과 초산전투 (국방일보)



제목 : 6·25전쟁 - 국군6사단의 압록강 진격과 초산전투,
aaaaa- 국군7연대 韓滿국경 요충점령 -

저자 : 전쟁사부 연구원 박동찬

수록 : 국방일보, 2002년 10월 29일


1950년 10월은 한국전쟁에서 일대전기를 마련한 기간이다. 세기의 도박이라고 통칭되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뒤이은 낙동강에서의 총반격으로 북한의 한국 점령 97일은 종언을 고하고, 국군·유엔군은 38도선을 돌파, 북진을 단행했다.
38도선 돌파는 유엔의 ''10·7 통한(統韓)결의안''에 의해 법적인 효력을 갖추게 됐고 이에 따라 국군·유엔군은 38도선을 돌파, 통일을 향한 북진의 진군나팔 대열에 합류했다.

10월 1일 동부전선에서 미국 미주리함의 함포 지원 속에 국군 1군단의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도선을 통과한 데 이어 서부 및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6사단이 제일 먼저 최초 방어지대인 38도 선상의 모진교(毛津橋)를 돌파해 북진길에 나섰다. 그 뒤를 이어 7, 8, 1사단이 10월 7∼11일 사이에 각각 38선을 돌파했다.

중부전선에서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한 국군 6사단은 김종오(金鐘五)장군이 개전 초기 춘천·홍천전투 이래 지연전 및 낙동강 방어선의 불리한 전투 속에서도 동락리·이화령·신녕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의 사기를 높이는 등 패전을 모르는 상승(常勝)부대였다.

특히 6사단이 중부전선에서 국군 사단 중 제일 먼저 38도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개전이래 전투력·장비를 그대로 보존하고 동락리전투를 비롯한 각종 전투에서 적으로부터 노획한 트럭을 다수 보유함으로써 국군 중 유일하게 자체 기동력을 갖춘 기동사단(機動師團)이었기 때문이다. 2군단장 유재흥(劉載興)장군이 6사단에 압록강 진격의 선봉을 맡긴 가장 큰 이유도 패전을 모르는 부대의 전통과 자체 기동력을 높이 평가한 데 있었다.

10월 5일 38도선을 돌파한 6사단은 한반도 중동부 지역을 맡아 8일에 화천, 9일에 김화, 14일에 원산을 점령하는 등 기동력을 발휘해 거침없이 북진을 단행했다.
원산 점령 이후 사단은 평양 탈환작전에 동원돼 평양 동쪽 80㎞ 지점에 위치한 양덕(陽德)을 점령한 뒤 압록강 진격이라는 보다 큰 군사목표를 위해 한만(韓滿) 국경선으로의 진격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6사단은 평양 우측 방면을 경유해 성천(成川)에서 곧바로 순천(順川)-개천(价川)-희천(熙川)을 거쳐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데 최선봉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6사단은 북한군 수뇌부 생포 및 미군 포로 구출을 위해 단행된 미187공수연대의 숙천·순천 공수작전의 연결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한·미간 공수연결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이어 사단은 22일 개천을 점령하고 어느 사단보다 빨리 청천강(淸川江) 계곡을 급진, 23일에는 압록강에서 60㎞ 떨어진 희천에 진입했다.

당시 국군·유엔군은 대부분 청천강 이남에 있었다. 국군 8사단이 덕천(德川), 미1군단이 청천강 남안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국군 1사단이 안주(安州), 영국군 27여단이 신안주(新安州)에 머무르면서 청천강 도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듯 압록강 진격의 최선봉에 선 6사단은 24일을 기해 한만국경선 진출을 위한 맥아더의 총공세 명령이 하달되자 초산(楚山)·벽동(碧潼)을 목표로 총 진격작전을 전개했다. 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7연대를 우일선으로 삼아 초산으로 진격토록 하고 제2연대를 좌일선으로 삼아 벽동을 목표로 진격토록 했다. 그리고 제19연대를 예비대로 삼아 희천에 대기시켰다.

10월 24일 오전 7시를 기해 초산·벽동 진격작전을 개시한 6사단은 선봉 부대인 7연대의 주력이 별다른 교전 없이 25일 초산 남쪽 30㎞ 지점에 위치한 고장(古場)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튿날 6사단은 사단 최정예 부대인 김용배(金龍培) 중령이 지휘하는 7연대 1대대를 선두대대로 하고, 2, 3대대를 예비대로 삼아 압록강을 향한 마지막 진격작전을 개시했다. 진격 도중 북한군 8사단장 오백룡(吳白龍)이 이끄는 연대 규모의 혼성부대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국경선을 눈앞에 둔 1대대 장병들은 1시간 30분 가량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을 물리치고 초산을 탈환했다.

초산 시가지에서 한만국경선인 압록강까지는 6㎞, 전 장병은 신속히 시가지를 빠져나가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앙토동(央土洞) 고갯마루에 올라섰고 선두에서 달려간 1중대 첨병소대는 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그때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으로 9월 16일 국군·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1일만에 이룬 쾌거였다. 6사단 7연대 1대대는 한만국경선까지 진출하는 최선봉의 영예를 획득했고 꿈에도 잊지 못하던 남북통일이 이루어진 것 같은 감격적인 순간을 맞았다. 6사단 장병들은 이 감격을 국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압록수''(鴨綠水)라고 적고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에 6사단은 오늘날까지 이 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 26일 초산전투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어 한국전쟁에서 가슴 벅찼던 그때 그날의 감동을 계승하고 있다.

이처럼 초산 탈환은 한국전쟁 기간 중 유엔군으로서 압록강변에 도달한 미7사단 17연대의 혜산진 점령보다 무려 한 달이나 빠른 10월 26일로 군사작전의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전쟁에서 담고있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6사단은 초산전투에서 단독으로 한만국경선상의 주요 요충지인 초산을 점령했다는 전투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북진통일의 꿈을 현실로 실현시켜 전쟁 목적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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