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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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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한민족의 대외 파병 역사(상) (국방일보)



제목 : 한민족의 대외 파병 역사(상)

저자 : 군사사부 선임연구원 서인한

수록 : 국방일보,2002.01.29


c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13세기말부터 21세기 초반에 접어든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려 7백여 년간 다른 민족의 군대와 함께 작전을 전개하거나 해외로 파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파병사를 개관해 보면 그 시대적 배경과 정책 결정과정은 어떠했으며, 얼마나 슬기롭고 용감하게 싸웠는가, 그에 따른 국가적 득실과 후대에 미친 영향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비록 시대적 환경은 급변하고 있으나 역대 파병사에 보이는 선조들의 지혜와 용맹은 ''세계 속의 국군''으로 활동 영역을 더욱 넓혀 가야 할 미래의 국군에게도 좋은 감계(鑑戒)가 될 것이다.

c13세기 후반 고려가 원나라 지원군 파병
우리 역사상 다른 민족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나라 밖으로 파병한 사례를 꼽는다면 먼저 13세기 후반에 고려와 몽고족의 원나라가 일본을 침공한 경우일 것이다. 고려는 30여년 지속된 몽고(蒙古)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한 직후, 세계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가진 원(元:1271년부터 몽고에서 원으로 개칭)으로부터 지원군 파병 요청을 받았다.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개선에 이어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시도하다가 결렬되자 무력 정복으로 방침을 바꾸게 되면서 원정군에 고려군의 파병이 추진된 것이다. 당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원정군의 전쟁 준비는 대부분 일본과 가장 근접한 고려 땅에서 이루어졌고, 수백 척의 전선과 각종 장비 및 군량은 고려군이 동원하였다. 고려군 8천명은 고려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지휘하에 이른바 여원연합군으로 원나라 군대 2만 5천명과 9백 척의 전선에 분승하여 1274년 10월에 합포(合浦:마산)를 떠나 대마도(對馬島)로 향했다. 그러나 제1차 원정군은 해전의 미숙과 태풍의 영향으로 실패했다. 6년여 준비기간을 거쳐 1281년에 고려군 1만명의 참전하에 2차 파병이 단행되었다. 이때도 고려군은 9백 척의 전선과 원나라 군대 3만명이 필요한 군량 및 전쟁물자를 함께 준비하였다. 2차 원정군은 중국 강남군 10만 명이 3천 5백 척의 대소 전함에 분승하여 일본으로 직행하는 등 1차 원정군 보다 훨씬 대규모가 컸다. 그러나 강남군의 지연도착에 따른 작전상의 차질,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 예기치 못한 태풍의 영향 등으로 인하여 10만의 병력 손실을 입고 실패로 끝났다. 고려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c그 후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1294년에 죽자 비로소 20여년 계속되던 전쟁 준비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2차 원정 직전인 1280년에 원정군 최고 기관으로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감독기관으로 변질되어 잔류하였다. 이처럼 외세에 의해 강요된 파병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원연합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태풍을 ''신풍(神風:카미카제)''이라 부르며 오늘날까지 대외 저항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15세기 전반 조선의 왜구 정벌군 파병

c고려 왕조를 이어 14세기 말에 새 왕조로 출범한 조선은 이미 고려말기부터 서남해안에 출몰하면서 극성을 부리던 왜구(倭寇)를 소탕할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이 파병은 13세기 후반에 고려군이 여원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과는 달랐다. 왜구의 노략질이 사회 혼란의 주요 요인이 되자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1419년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로 쳐들어간 것이다. 이른바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불리는 파병은 명(明)나라로 향하던 왜선 40여 척이 그해 5월에 뱃머리를 돌려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서천 도둔리) 일대로 쳐들어온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충청 수영의 병선 7척이 불타고 황해도 해주(海州) 일대에서 수군과 접전을 벌이는 등 서해안 일대가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다.
이에 조정 중신들은 왜구들이 복귀하기 전에 대마도를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정벌군 편성을 독려하였다.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의 지휘하에 6월 중순에 거제도 앞바다에 집결한 출정부대는 대소 전선 227척에 1만 7천여 명으로 편성되어 6월 19일에 대마도로 향했다. 조선군은 6월 20일 정오 무렵부터 기습적으로 대마도에 상륙하여 투항에 불응하는 왜구의 크고 작은 선박 140여 척을 빼앗아, 20척을 압류하고 나머지는 가옥 2천여 호와 함께 모두 불살라 버렸다. 왜구 우두머리 11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납치되어 온 조선인 8명과 중국인 남녀 140여명을 석방시켜 주었다.
c그러나 6월 29일에는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의 부대가 지형에 밝은 왜구들의 매복 작전에 말려들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조선군이 목책을 설치하는 등 장기 주둔할 기세를 보이자 대마도 도주(島主)가 왜구의 단속을 약속하면서 화해를 요청해왔다. 여름 장마와 태풍이 몰려올 것을 우려한 조선군은 도주의 화해 제의를 받아들이고 7월 3일에 거제도로 복귀하였다. 그 직후에도 재출병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거제도에 태풍이 불어 전선들의 피해가 커지자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태종(太宗) 말기의 이 파병은 외부의 요청이 없는 상황에서 조선군 단독으로 기습 공격의 성격을 띠고 추진된 해외 출병이라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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