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036
일 자
2003.07.20 19:27:13
조회수
2133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정책 구현과 군사외교 강화 (국방일보)



제목 : 국방정책 구현과 군사외교 강화

저자 :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백기인

수록 : 국방일보, 2002.05.21


c1970년대 우리 군은 국방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종래 1년 단위로 국방시책을 추진하던 데서 면모를 일신하여 중·장기적인 전망 하에서 수립체계를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안보환경의 변화에 따라 1972년 12월 국방목표(國防目標)를 정립하여 국방정책과 군사전략의 수립방향을 명시화하였다. 무엇보다 국제적인 데탕트와 달리 북한의 고조된 도발 위협을 저지하는 한편, 군의 전략적 발전을 위한 미래지향적 정책 수립과 추진을 모색하면서 합참의 ''합동전략기획''과 연계시켜 국방업무전반을 ''국방 및 전략기획''으로 통합 추진했던 것이다.

c이러한 국방정책과 전략의 추진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연구·개발과 수립은 물론 제반 사업과 계획의 효율화를 도모할 수 있는 정책기획관 직제가 장관 직속으로 신설되었다. 국방예산 편성의 효율화와 국방관리의 합리화를 위한 국방기획관리제도도 시행되었다. 그밖에 국방부는 군현대화를 위해 율곡사업과 같은 전력증강사업 등을 비롯하여 정신전력체계의 확립 등 유·무형의 균형있는 전력발전을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c당시 국방정책은 무엇보다 자주국방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중점이 있었다. 월남 공산화 이후에는 고무된 북한의 남침욕을 사전에 봉쇄하고, 군현대화에 박차를 가해 완벽한 임전태세를 갖추며 한·미연합작전의 능력을 제고하여 전쟁억제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하여 확고한 한미연합방위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c1970년 후반기에 수립된 중기(中期) 국방기본정책은 1980년대 국방정책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기본방향은 현실적으로 한·미 군사협력체제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전쟁억제력을 확보하는 자주국방태세로의 전환이었다. 당시 자주국방에 대한 국군의 의지는 국력의 신장을 토대로 한 국군의 발전상을 잘 보여준다. 이제 군은 군사력 건설과 국방관리의 효율적 운영을 모색하면서 자주적인 방위태세 확립, 국방관리 개선을 위한 제도 정착, 정신전력 육성 등 제반 정책의 통합적 발전을 지향하게 되었다.

c한편, 군사외교 차원에서 국방부는 정부 차원의 안보외교와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관계국과의 장관급 회담을 비롯하여 인적·물적 교류를 통한 군사적 신뢰 증진 및 협력을 증진시켰다. 군사외교의 기조는 남·북한간 대립과 긴장을 완화시켜 북한의 대남도발을 견제하고 나아가 관계국과의 군사적 협력과 대응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의 ''8·15선언'', ''6·23선언'' 등으로 표방된 평화통일원칙에 기초한 일련의 적극적인 안보외교에 부응하면서 국방부는 관련국과의 군사관계를 견실하게 다져나갔다.
그러한 군사외교의 성과는 한·미, 한·월간의 현안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우리 군은 주한 미7사단이 철수한 후 추가적인 미군의 철수를 막고 한반도 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상호인식을 공유하면서 연합방위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바로 한·미제1군단의 창설에서 한·미연합사의 창설로 이어진 결과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c또한, 주월군 철수를 둘러싼 한·미·월간의 협의를 통해 장관급 군사외교를 적극 추진하여 상호간에 원만한 타결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월남휴전이 성립되기 직전 1972년 2월 8일 유재흥(劉載興) 국방부장관과 박원근(朴元根) 합참본부장 등 국방수뇌는 직접 월남을 방문하여 티우(G. V. Tieu) 월남대통령, 비엔(C. V. Vien) 월남군총사령관, 그리고 에이브람즈(C. W. Abrams) 미군사령관 등을 직접 만나 논의하여 주월군 철수에 대한 ''최대한의 효과적인'' 최종 결정을 도출해 냈던 것이다.

c주목할 외교사안으로 한국군현대화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한특별군원을 포함한 15억 달러의 지원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 사실이다. 종전의 국방각료회의는 양국 합의에 따라 1971년도부터 외무-국방고위층 대표로 구성되는 연례 안보협의회의(安保協議會議 : SCM)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한·미연합사의 창설에서 1978년 제1차 한·미 군사위원회회의(MCM)를 열어 이를 정례화시켰다. 양국의 연합기획참모단에서는 한·미공동방위체제를 발전시키고자 한국방어계획과 참모연구 등의 업무를 수행했는데, 한국측이 단장(김재명 육군준장)을 맡아 긴밀한 군사외교적 채널을 가동하여 유엔사의 작전계획을 보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c이러한 군사외교분야의 성과 중 전문 군사외교기구를 설치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국방부는 우방국과의 군사적 협력·교류를 보다 효율적이고 전문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국방정보본부를 신설하였다. 직할기구로 설치된 국방정보본부는 종래 합동참모본부 내 정보국을 군사정보에 관한 정책적인 수립과 조정을 전담하는 기구였다. 이로써 재외공관 주재무관의 파견과 운영, 주한 외국무관과의 협조 및 연락, 그리고 군사외교와 군수·방위산업 등에 관한 정보지원을 보다 원활하고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한미통상조약 체결의 역사적 의의 (국방일보)
이전글 남베트남의 패망과 역사적 교훈 (국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