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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1 13: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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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4>
<14>김유신의 군사 리더십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기를 기회로 바꿔 / 2011.08.11]

담대한 지휘력·지략 갖춘 전술가

김유신 장군의 생가 사진(상단)/김유신 장군의 생가 옆에 있는 화랑무예태권도성지 사진(하단)

김유신은 한국 역사상 주목받는 인물 중의 하나다.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69명 중 그는 첫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삶과 행적이 `삼국통합'이란 과제를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역사 발전에도 적지 않 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가계와 출생 설화

김유신은 595년 만노군(萬弩郡ㆍ진천)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본래 김해 금관가야의 왕족이었고, 증조부가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다. 조부 김무력(武力)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사로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경주의 진골 귀족들에 비해 보이지 않는 차별대우를 받았던 듯하다. 부친 서현(舒玄)의 혼인담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어느 날 서현은 길에서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의 아들 숙흘종의 딸 만 명(萬明)을 보고 한눈에 반해 눈짓으로 꾀어 결합했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돼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은 딸이 야합한 것을 알고 별채에 가둬버렸다. 이때 갑자기 벼락이 쳐 문지기가 놀란 사이에 만명은 창 문으로 빠져나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얼마 후 한 아이가 황금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만명이 임신해 20개월 만에 아기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김유신이었다.

청년기의 수련과 입문

609년 15세의 김유신은 화랑으로 뽑혀 낭도들과 함께 수련에 들어갔다. 고구려와의 힘겨운 전쟁이 계속되던 때였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하루빨리 미륵부처가 나타나 화평세계를 실현해 주길 갈망했다. 화랑단체에 기대 를 걸던 그들은 화랑 김유신이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이라 여겨 그 무리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611년 김유신은 홀로 중악(경주 단석산)의 석굴로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맹세했다. 그때 그의 가슴속에서 국가의 화난을 막고 삼국을 병합할 마음이 싹튼 듯하다. 사료에는 그가 눈물을 흘리며 수차례 간청하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비법을 가르쳐 줬다고 전한다.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노인은 사라졌고 산 위에는 오직 찬란한 빛이 보일 뿐이었다.

이듬해인 612년 김유신은 또다시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인박산(咽薄山)으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며 중악에서처럼 맹세하던 때다.

낭도들과 밤낮으로 적국의 정벌을 모의하던 중 고구려 첩자인 백석(白石)이란 자에게서 현지로 가 직접 실정을 정탐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들이 밤에 길을 떠나 고개 위에 이르렀을 때 두 여인이 따라왔다. 그리고 골화천(영천)에서 자게 됐을 때 또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김유신과 함께 과자를 나누며 담소하다가 그를 숲 속으로 끌고 가서 자신들은 세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의 사람이 끌고 가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고 한 다.

김유신은 사람의 도움도 받았다. 625년 31살에 9살 젊은 김춘추와 처남매부가 됐다. 그의 누이 문희(文姬)가 신라 최고의 관직에 있는 김용춘의 아들 춘추와 혼인한다는 것은 분명 정략적인 결합이었다. 김춘추의 옷고 름을 일부러 밟아 떨어지게 한 후 문희에게 달아주게 하고, 김춘추 또한 김유신의 뜻을 알아 그녀와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군사지휘관으로서 출전과 전공

629년 김유신은 당주(幢主)라는 중견지휘관으로 고구려군이 점령한 낭비성(포천 반월산성)으로 처녀 출전했다. 부친도 출전했으나 첫 전투에서 참패해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에 그가 나서 말을 타고 이리저리 참호를 돌며 적장의 머리를 베었다. 이를 본 신라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 5000여 명의 목을 베고 1000여 명을 생포했다.

642년 이번에는 백제군이 낙동강 유역 전선사령부가 있는 대량주(大梁州)의 거점인 대야성(합천)을 기습해 함락시켰다. 이때 김춘추가 딸과 사위를 잃고 고구려 청병길에 오르면서 김유신과 김춘추 두 사람의 관계는 혈맹의 관계로 발전했다. 60일이 지나도 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그가 직접 3000의 군사로 구출에 나섰던 것이다.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 때도 마찬가지다. 김유신은 춘추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부대를 출동시켜 여왕이 있는 월성에 진영을 설치하고 반군의 진압에 나섰다. 경주의 동쪽 명활성에 진을 친 반군과의 공방전은 10여 일간 계속됐다. 그때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자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아 관군의 사기가 꺾였다. 이에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고 불을 붙여 연으로 날려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말을 퍼뜨렸다. 민심이 수습되자 즉시 강습을 감행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비담의 반군을 진압했다.

642년 이후 백제의 공격이 거세졌다. 신라군은 낙동강 동쪽으로 후퇴했다. 김유신은 신설된 압량주(경산)의 군주로서 비상 임무를 맡았다. 644년 9월 그는 상장군으로 낙동강을 건너 백제의 가혜성 등 7개 성을 격파했 다. 이듬해 정월에 돌아와서는 왕을 뵙기도 전에 다시 백제군이 매리포성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처자를 만나지도 않은 채 출진해 적 2000수급을 베었다. 3월에도 왕궁에 도착해 미처 집으로 가기 전에 급보를 받자 바로 전선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그때 집 앞을 지나 50보쯤에 말을 세워 미음을 마신 후 “우리 집 물맛은 예전 그대로구나”라며 길을 재촉했다. 이에 군사들이 자신들의 골육과의 이별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고 모두 종군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전장 리더십

50세를 넘은 김유신은 여전히 전선을 넘나들었다. 647년 10월 백제군이 다시 무산성 등을 공격하자 그는 보·기병 1만을 이끌고 출격했다. 적의 거센 공세에 신라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때 좌중을 독려해 비령자와 그 아들 거진과 노인 합절의 분전을 끌어내 전세를 역전시켰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십의 힘이었다.

그의 리더십은 과연 사람의 마음을 꿰뚫었다. 648년 압량주 군주로 있을 때 민심의 동향을 읽고 병력을 모은 상황은 압권이다. 그때 그는 마치 군사에 아무 생각도 없는 듯이 술 마시고 노래하며 몇 달을 보냈다. 그러 자 마을 사람들이 전투도 해보지 않은 용렬한 장수라 불평하자 그들을 쓸 수 있음을 알고 때를 놓치지 않고 왕에게 백제 공격을 건의했다. 그는 시간을 기다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지휘하는 지휘관이었다.

드디어 대야성 탈환전이 시작됐다. 20여 성을 빼앗고 2만여 명을 베고 9000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획득한 백제 장수 8명을 품석 부부의 뼈와 교환할 것을 제안했다. 백제 측이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보내왔다. 이때 김유신은 “한 잎이 떨어진다 해 무성한 풀이 줄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 해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며 약속대로 백제 장수들을 돌려보냈다.

648년 8월 백제의 은상(殷相)이 침공했을 때도 그의 지략과 담대한 지휘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하지만 신라군이 다섯 방면에서 공략했지만 10여 일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때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있던 그의 군막 위로 물새가 날아가니 모두 불길한 징조라 했다. 이에 그는 곧 백제의 간첩이 올 것인데 모른체하다 내일 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결전하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백제의 간첩이 은상에게 돌아가자 김유신 은 역으로 급습을 감행해 큰 승리를 거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두려움 없이 침착하고 사려 깊은 지휘로 최상의 결과를 이루는 그의 리더십의 개가였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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