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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전장새부 선임연구원 손규석 |
c 1945년 9월 2일은 우리 민족의 비극인 한반도 분할과 군정통치가 공식화된 결코 잊지 못할 날이다. 38선을 경계로 한 민족분단과 군정통치의 시발점이 된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가 바로 이 날 포고되었기 때문이다. c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구상된‘38선 분단안''이 국경 아닌 국경으로 굳어진 배경에는 주변 강국들의 정략적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소련은 그들의‘극동작전계획''에 따라 1945년 8월 8일 대일전에 참전하여 북한을 점령한 후 미국이 제안한 38선 분할안을 수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동구에서 사용한 팽창주의적 점령정책을 한반도에서도 추구함으로써 우리의 국토를 분단시켰던 것이다. c한편 미국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소련의 참전 기회를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원폭투하를 확정한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작전계획을 단독점령으로 결정하였지만, 예상보다 빠른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인해 한반도 단독점령계획을 분할점령책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한반도 단독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서울·부산·인천 등을 그들의 영향력 하에 포함시킨 38선을 경계선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c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일본은 소련이 참전한 이틀 후인 1945년 8월 10일 한반도 주둔 일본군을 관동군에 귀속시켰다가 8월 15일에는 38선 이북을 관동군이 관장하고, 이남은 제17방면군이 지휘하도록 계획을 수정하였다. 이는 38선을 중심으로 이북과 이남에서 소련과 미국이 각각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토록 함으로써 한반도를 분할하려는 일본의 마지막 흉계였다. c이처럼 당시 주변 강국들은 우리 민족이 바라던 ‘통일 독립국가 건설’과는 무관하게 자국의 국익과 정략에 따라 한반도 분할을 추진하였지만, 분단의 모든 책임이 주변 강국에만 있지는 않았다. 당시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영구적인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타협과 협상의 지혜를 발휘했더라면 분단을 방지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였다. c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과 더불어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위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중도 및 좌·우파의 연합적 성격을 지녔던 건준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표방하였다. c그러나 공산주의자인 박헌영 일파의 책동으로 건준 내부에 분열이 조장되어, 결국 건준은 해체되고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는 무산되었다. 미·소 양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건준을 중심으로 연합국과 완전독립 및 군정종식을 위한 협상을 추진했다면 국토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c이러한 예는 국가적 단결을 통해 국토분할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오스트리아의 경우를 통해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1938년 3월 히틀러의 강압적 합병으로 주권을 상실하고 독일제국의 속국으로 침략전쟁에 참가했던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었다. 1945년 1월 29일 미·영·불·소 4대 연합국은 ‘연합국 공동점령안’을 마련, 오스트리아 영토의 4개 지역 분할점령과 비엔나 시의 4개 지역 분할공동관리체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의 군정지배와 함께 국토분단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c이에 오스트리아 국민과 모든 정치·사회·경제 단체는 ‘국민적 단결’과‘정치적 통합’없이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였다. 또한 새로이 등장한 정치세력과 지도자들도 당파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일체감을 조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c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던 정치가 칼 레너(Karl Lenner)는 주요 정당지도자들과의 합의를 통해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하고 국가적 단합을 이끌어냄으로써 이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이념적 대립과 정치적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민족분단이라는 비극을 가져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우리는 현재 50여 년간의 냉전체제에서 불거진 민족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통일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서있다.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극단적인 진보논리도, 그리고 환상적인 통일론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통일의 방법은 결코 아니다. 오직 국민적 총화와 국가적 단결이 전제가 된 그런 통일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파를 초월해 단결력을 과시했던 오스트리아 정치지도자들의 혜안을 역사적 교훈으로 깊이 되새기면서, 견고한 국방력의 바탕 위에서 반목과 갈등의 역사를 마감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