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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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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월남참전과 자주국방의 교환 (국방일보)



제목 : 월남참전과 자주국방의 교환

저자 : 국방사부 연구원 이미숙

수록 : 국방일보, 2001.09.25


c 현재 우리나라의 국방비는 GDP 대비 2.7%로 안보위협이 가장 높은 국가중의 하나이면서도 세계 평균치인 4.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수치는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했던 1970년대초에도 국방비 부담율이 6%였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변화된 전략환경과 안보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1970년대 자주국방 노력의 이면에는 ''월남참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이를 기회로 삼아 자주국방태세를 확립하고자 노력한 정부의 강인한 의지와 군의 강력한 실천이 있었다.

c한국군은 1964년 9월 비전투부대의 월남파병을 시작으로 8년동안 4차례에 걸쳐 총 320,000여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c파병당시 우리의 국방여건은 전투력이 우세한 북한군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이 겹쳐 국가안보의 총체적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 더욱이 국방비의 60%이상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력으로 군사력을 건설할 능력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독자적인 군사전략과 작전지휘권도 가질 수가 없었다.
c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을 미국과 월남정부가 요청한 ''한국군의 월남참전''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박·존슨 공동성명이 시사하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한 한·미 안보협력관계를 이룩하였고,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브라운각서''를 통해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과 군사·경제원조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정부는 불과 몇 년만에 자주국방을 추진할 수 있는 국방비를 확보하게 되었다. 파월 전 미국의 군사원조는 연평균 2억 8,500만달러였으나 파병기간 동안에는 매년 증가하여 ''71년에는 3억 6,100만달러에 이르렀다.
c 이와함께 군원이관의 중지로 국방비 예산의 9,310만달러, 주한미군의 계속주둔으로 8억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 그밖에 월남특수에 의한 9억달러의 외화수입과 한·미동맹관계의 강화로 가능했던 27억달러 상당의 외자도입도 국방비의 자체 부담률을 높이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금액은 어려웠던 한·일협상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이란 명목으로 받아낸 금액이 6억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금액이었다. 그리하여 1971년에 이르러서는 국방비의 91%를 한국이 담당하게 되었고 창군이래 처음으로 장비증강과 군현대화를 위한 투자비를 자체 국력으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c 우리군은 이를 원동력으로 방위산업과 한국군현대화계획에 박차를 가하여 F-4D 팬텀기 18대, 신예구축함 2대, 대간첩용 군사장비, M-16 소총을 포함한 개인화기, 화력·기동·통신·건설장비 지원과 향토예비군 무장을 위한 소총공장 건설 지원, 3개 향토사단의 전투사단화 등을 추진하였다. 파병당시 M-1과 카빈 소총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군은 월남전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M-16 자동소총으로 무장할 정도로 전력을 실질적으로 증강시켰다.
c우리군의 자주적 노력은 작전지휘권과 군사전략 부문에서 더욱 돋보였다.
c미국측은 지휘권의 단일화 차원에서 주월한국군도 다른 외국군대처럼 주월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군은 끝까지 지휘권을 넘겨주지 않았고, 우리군의 의지에 따라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였다.
c군사전략에 있어서도 주월한국군은 미국의 작전개념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전술교리를 개발하여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오히려 미군이 한국군의 전술교리를 배워갈 정도였다. 우리군은 월남에서 체득한 실전경험을 한국적 상황에 활용하여 전 전선을 요새화 하고, 철책선을 연해 각종 진지와 장애물을 보강하고 경계를 강화하여 종전보다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춤으로써 휴전선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국방은 독자적인 한국의 전략이 없다고도 볼 수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월남전에서 개발한 군사전략과 전술 및 현대무기를 사용한 전투경험 등으로 실로 획기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c그러나 1969년 닉슨독트린이 발표된 이후 미국의 대월남정책이 ''월남전의 월남화정책''으로 수정되면서 강화되었던 한·미방위공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월남파병을 계기로 확고해졌다고 믿었던 한국정부의 여망을 무시한 채 1971년 3월 주한 미 제7사단의 철수를 강행하였고, 군원을 삭감하였으며 중지되었던 군원이관도 재개하였다. 미국의 대한안보공약은 한국군의 월남참전이 요구될 때에 강력한 방위의지를 천명했을 뿐, 미국이 월남을 포기하는 전략인 닉슨독트린을 발표한 이후에는 한반도에 대한 안보공약도 형식적인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결국 월남참전을 계기로 한·미간의 안보협력체제가 강화된 것은 사실이나 월남참전으로 인하여 한국안보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이나 입장이 변화될 수는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c정부는 이러한 한계속에서도 자주적인 노력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슬기롭게 활용하여 미 제7사단의 철수 대가로 한국군현대화를 보장받음으로써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더 근원적이고 자주적인 방안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중심의 의타적 국방태세에서 벗어나 자주적 국방태세를 구축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는 ''자주국방태세의 확립''이라는 중대결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주국방을 가속화시켰다.
c 군은 1972∼1973년간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단행하였고, 복귀한 주월한국군사령부를 모체로 제3군사령부를 창설하여 주한미군의 철수로 조성된 국가안보상의 공백을 보완함으로써 전 휴전선 155마일의 방어임무를 휴전 18년만에 자력으로 전담하였다. 철수과정에서도 주월한국군은 주월미군이 전투병력을 완전히 철수하였으나 실리를 추구하면서 휴전협정 직전까지 주력부대를 잔류시킴으로써 미국과 월남에 대한 군사적 신의을 잃지 않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안전보장과 지원을 가능한 최대로 확보함으로써 자주국방력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특히 철수시 휴대한 2개사단 분의 현대식 파월 복귀장비들은 군 전력증강에 크게 기여하였다.
c뿐만 아니라 우리군은 월남참전으로 증강된 국방력에 힘입어 자주국방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증강사업(''74∼''81) 일명 율곡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군은 명실공히 오늘날의 현대화된 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c결국, 힘있는 나라만이 생존할 수 있으며 힘이 뒷받침될 때 외교협상도 효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경험을 자기의 교훈으로 삼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고도 계속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다. 1970년대 자주국방태세의 확립이 오늘의 국방을 있게 했듯이, 오늘의 우리는 월남참전을 통해 위기를 자주국방의 기회로 삼은 지혜와 자주적 노력을 되새겨 21세기 정보화·과학화된 첨단 군사력 건설을 위해 ''자주적 방위역량 구축''을 내실있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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