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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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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상무정신의 현대적 조명(국방일보)



제목 : 상무정신의 현대적 조명

저자 :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백기인

수록 : 국방일보, 2001.10.01


상무정신의 문화적 뿌리

c역사적으로 한민족(韓民族)은 ''숭문(崇文)''과 더불어 ''상무(尙武)''적 기풍이 강한 민족이었다. 조선인들은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종주국인 중국에서보다 유학을 심화시켜 세계의 빛나는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그러한 문화의 토양 위에서 유학의 육예(六藝)에 의해 수련된 선비정신은 의병의 기개(thymos)로 발현되기도 하였다.
c조선시대 문치주의의 사회적인 폐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문사들이 개인적으로 문무겸전을 완덕으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당시의 숭문적 폐해는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누란의 위기에서 표출된 의병정신은 상무적인 선비정신에 다름 아니었다.

전환기, ''조선국방사''의 교훈
c역사적 전환기에 자주적인 국운개척의 노력을 말해주는 조선후기의 국방사(國防史)는 더욱 깊은 의미를 던져준다. 조선은 임란의 폐허를 점차 극복해 갔으나 대륙은 명과 청이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일본과는 가까스로 국교가 재개되었지만 적개감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임란이 끝난 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8세기초 통신사행을 적은 기록인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에서는 조선인들의 심리적인 동요가 발견되고 있다. 통신사들은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려 일본의 문화적 야만성을 힐난하면서도 실상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주자학이 약한 반면 오히려 다양한 학문이 발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쿠가와 일본의 도시와 상업혁명 결과는 실로 놀라운 충격이었다.
c대륙의 청 나라에 대한 조선인들의 의식에도 괴리가 생겼다. 해외파병으로 조명(朝命)이 다한 명은 만주족인 후금(後金)에게 중원을 내주었다. 대륙정세의 변화로 조선인들의 중국관에 일대 혼란이 일지 않을 수 없는 안보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제 조선인들은 명분과 현실의 기로 속에서 갈길을 선택해야 했다. 오늘 냉전시대를 지나 개혁개방이라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과거사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한·중·일의 관계에 비추어 생각해 볼 대목이다.
c결국 청이 약해져 머지않아 몰락하리라는 소문이 돌면서 ''북벌(北伐)'' 의식이 재기되었는가 하면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배일(排日)''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정은 군사적인 개혁을 포괄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시무책을 추진했다. 호학(好學)의 군주인 영·정조가 추진한 왕조중흥을 위한 개혁정치가 그것이었다.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과 주변국의 대두라는 전환기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국정운영 전반에 걸친 변통(變通)을 시도했는가 하면 군사적으로는 금과옥조로 여긴 당대병서의 전범인 ''기효신서''를 비판하고 ''병장도설''과 같은 조선적인 병법을 채택하였다.
c지병가들은 중국과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한 입체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군영제와 조선초의 오위제를 결합시키는 방향에서 군제가 재검토되었고, 제승방략(制勝方略)과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연계시킨 육·해방의 통합적인 전략이 수립되었다. 누대의 병폐인 양역(良役)의 폐해를 최소화하고자 애썼으며, 국가의 재정이 허용되는 범위내에서 병력수도 늘렸다. 현실적 필요에 의해 상무에 대한 인식이 제도 안에서 일정한 성과로 구체화된 셈이었다.
선왕인 영조에 이어 정조는 ''도성방위''를 완비하여 수도권방어체제를 재조정했는데, 지금의 수원성인 화성(華城)의 건설은 그러한 노력을 잘 보여준다. 선왕인 영조는 조선의 갈길을 위해 ''어제풍천록''을 직접 찬술하면서 군사적 개혁을 주도했고 그 손자인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담긴 여러 사안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개혁과 통합의 안목으로 왕조중흥을 위한 광범위한 노력을 전개했던 것이다.
c이러한 상황에서 군사방책은 물론 사회의 개혁책을 제시한 실학적 전통은 한 몫을 담당했다. 당시 실학이란 공론적 담론을 넘어서 학문의 실용성을 현실에 접목시키고 있었다. 양란의 역사적 상처를 되새기며 관념적인 자존을 유지했던 일부 조선인들과 달리 그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민족의 진로를 고심한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냉정하게 국제적 현실을 직시하고 한민족의 갈길을 제시하였다.
c우리는 그렇듯 개혁적인 움직임이 고조된 18세기 후반기에 도성과 강화도 및 변방을 오가며 국방실무에 노심초사했던 한 군사전문가를 특별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송규빈이다. 행적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군사연구에 종사한 전문가로서 그는 말년에 국왕의 심금을 울린 ''풍천유향(風泉遺響)''이란 국방전략을 제시하였다. 영조 집권후기에 송규빈은 장차 정조대 국방개혁안의 초석이 될 필생의 역작을 상소와 함께 봉상하였다. 평생의 적공(積功)을 조국과 민족 앞에 바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c『승정원일기』에는 당시 영조의 다음과 같은 비답(批答)이 보인다. : "아! 이런 말을 구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어 마음으로 늘 개탄했었다" 국왕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녹비를 하사했다고 한다. 실로 감동적인 이야기다.
민족사를 통해 그러한 노력들이 적지 않았건만 우리 민족이 근대에 와서는 급기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해답을 몇 마디의 말로 지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 내재하는 ''변화'' 즉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와 관련이 크며, 국가의 안녕과 민족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일시적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학자인 다산(茶山)은 "병이란 백년 동안 쓰지 않아도 좋으나 하루라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전고를 들어 유비무환의 정신을 역설했다. 평화시에 전쟁을 준비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된다는 서양의 속담도 있다.

성년국군의 정신적 좌표
c현대사에 들어와 우리 군은 신생국의 간성으로서 6·25전쟁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출발하였다. 이제 성년이 된 국군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한 국력과 국민적인 지지 속에 견실한 민·군관계를 정립해가면서 국민의 군대로서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다.
전환기적 시대 상황에서 우리 군은 새로운 인식과 발상으로 변화를 관리하고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c''21세기 신국방''을 정책적 핵심으로 추진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역사의 진리이다. 우리 군은 전환기를 맞아 민족의 활로를 개척했던 선현들의 경험을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삼아 문무의 균형적 발전 속에서 ''상무정신''을 되살려 21세기 ''강군육성''을 위한 국군의 정신적 지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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