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오늘로 건군 52주년을 맞는 국군은 병력면에서 중국, 러시아, 미국,
인도, 북한 다음의 세계 제6위의 군사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창군 초기만 해도 국군은 18세기 미국 독립군 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국군이 이제는 어엿한 장년 국군으로 성장하여 전쟁방지를 위한 억제세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제평화유지군으로서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있다.
c국군의 발전과정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 바로 그것이었다. 국군은 창군 이전부터 대내외적으로 수 없이 많은 도전을 받았고, 또 그 과정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해 나갔다. 즉, 해방 이후 부터 계속된 북한의 직·간접 위협과 도발, 그리고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국내외적 상황으로 항상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c그러나 우리 국군은 이러한 대내외적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국과
함께 동북아시아 안보세력의 핵심축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장족의 발전을 보인 우리 국군을 창군에서
오늘의 자랑스런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발자취를 되돌아 보고, 21세기 통일 한국시대에 대비한 새로운 국군상을 조망해 보는
것도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創軍, 6.25戰爭, 그리고 戰後 整備
c국군은 1948년 8월 정부수립과
동시 정규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국군의 창설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방 이후 남한은 좌우익의 대립과 경제난
등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때 군사경력자들이 조직한 사설 군사단체들간의 대립과 충돌은 남한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c미 군정은 경찰력만으로 치안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군대창설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 군정은 1945년 11월 군정청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한 후, 국방사령부에 조선경찰예비대를 두어
치안을 담당케 하였는데, 이것이 국군의 모체인 남조선국방경비대이다.
c 그러나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가 국방사령부의
''국방''이라는 용어에 대해 트집을 부리자 미 군정당국은 이를 국내경비부로 바꾸었다가 다시 통위부(統衛部)로 개칭하였다.
통위부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새로 발족한 국방부에 업무를 인계하였다. 이 때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과 해군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에는 공군과 해병대가 각각 창설됨으로써 국군은 육·해·공군 3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c그러나 군 초창기 미 군정의 불편부당(不偏不黨)주의에 의해 군내에
잠입한 좌익분자들은 제주도 폭동사건을 비롯하여 여·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이때 국군은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소탕작전과 선무공작을 병행하였고, 숙군작업을 통해 1948년부터 6. 25전쟁 직전까지 4회에 걸쳐 총 1,300여명에
달하는 불순분자들을 색출하였다. 북한은 6. 25를 앞두고 게릴라를 침투시켜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 지역에서 후방을
교란시켰다. 이에 국군은 공비소탕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작전을 다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6. 25 전쟁을 맞게 되었다.
c이처럼 6.25 전쟁은 창군된지 얼마 안되는 우리 국군에게는
최악의 상황과 조건에서 잘 훈련된 적과 싸운 최악의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의 전개는 미국의 웨인스테이트 대학의
모스맨(B. Mossman)교수의 저서『밀물과 썰물(Ebb and Flow)』의 책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피·아가 밀고 당기기를 한 번씩 행하고 38선 부근에서 수차례의 격렬한 전투를 치른 후에 승자없는 전쟁으로
끝을 맺었다.
c그러나 국군은 이 기간 동안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를 통해 급속히
팽창하여 1958년에는 70만 대군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국군은 6.25 교훈에 따라 부대를 개편해 나갔다. 이에
육군은 최초 전방작전, 후방지원, 교육훈련체제인 1군사령부, 2군사령부, 교육총본부체제를 유지하다가, 그 후 감군정책,
군수지원체제 정립, 교육훈련제도 개선에 따라 교육총본부를 해체하고 1·2군 및 군수지원사령부체제로 바꾸었다. 해군과
공군도 한국함대사령부와 F-86전투기 도입 및 전투비행단 창설을 통해 현대적 군으로 나아갔다.
越南派兵과 國防體制定立
c1961년 5·16과 함께 전투력
증강과 정비에 총력을 경주하던 국군은 1964년 9월 월남정세가 악화되자, 미국과 월남정부의 요청에 의해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1만명을 파병하였다. 월남전에는 먼저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단, 공병 및 수송부대 등 지원부대를
파병하였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사이공에 주월(駐越) 한국 군사원조단을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961년 10월 부터
전투부대인 수도사단과 해병 2여단, 보병 제9사단을 파병하였는데, 이 때 파월병력은 5만여명에 다달아 종전의 주월
한국 군사원조단은 주월 한국군사령부로 확대·개편되기에 이르렀다. 국군의 월남파병은 건국 이후 첫 해외원정으로 아시아의
자유를 위해 반공전선에 참여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월남 파병은 국군의 현대화 계획을 추진해 나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장병들로 하여금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c1960년대 북한은 4대 군사노선과 전례없는 강경 도발, 즉
1.21 청와대 기습, 미국의 푸에블로호 납치, 동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통해 한국의 안보를 위협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정부는 대간첩본부 설치, 예비군 창설, 그리고 1968년부터 시작된 국방각료회의(후에 안보협의회의)를 통한 예비군의
무장화, 장비의 현대화, M-16소총 생산 등에 합의를 봄으로써 군사력 증강 및 군 현대화에 주력하였다. 국방부는
예비사단의 전투사단화, 유도탄 대대 창설, 포병과 전차부대의 현대화, 대간첩작전용 고속정 건조와 호위구축함 도입,
작전사령부 창설과 F-4D 전투기 도입 등 전력증강을 꾀함으로써 군장비의 현대화와 국방체제정립에 노력하였다.
對美依存에서 自主國防 體制로의 轉換
c1970년대는 주한미군의 감축과
미국의 무상군사원조 종료, 월남의 적화, 그리고 1977년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전면 철수선언 등으로 한국은
국방에서의 대미의존를 탈피하고, 자주국방으로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c이에 국방부는 1972년 군사력 운영개념과 군사전략목표설정의
기본이 되는 국방목표를 제정하고, 이를 위해 국방기구의 합리적 통합, 군 지휘체계의 공고화, 국방정책연구 기반조성
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와 병행하여 1977년 자주국방의 핵심사업인 방위산업육성을 위한 ''방위산업 특별조치법
시행령''을 제정하였고, 이를 기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소화기로 부터
해군 전투함에 이르기까지 각종 무기를 개발하여 방위력 증강에 기여하였다. 또 1974년부터 시작된 ''1차 율곡사업''도
군의 전력증강에 기여하였다. 또한 국방대비태세 완비와 한미연합방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1973년에는 제3군사령부를,
1976년부터는 ''팀 스피리트''훈련을, 그리고 1978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였다.
c1980년대에도 버마 아웅산 암살 폭파사건과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 북한의 도발속에서, 국방부는 북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한 전력격차를 좁히기 위해 군사전략 개념의 수정, 군사대비태세
강화, 방위산업육성, 제2차 율곡사업(''82-86) 등을 통해 자주국방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였다. 또한 국방부는
3군통합전력의 극대화를 위해 한국형 합동군제인 합동참모본부를, 육군은 수도방위사령부와 동해안 및 후방지역 작전을 위한
군단사령부를, 해군에서는 1·2·3함대사령부를, 그리고 해병대는 해병대사령부를 창설하였다. 장비의 현대화를 위해서
한국형 전차와 장갑차, 500MD헬기, 한국형 호위함 개발, 신형 상륙돌격장갑차, 제공호 생산과 F-16 전투기 및
C-130수송기의 구입을 통해 자주국방 체제를 공고히 해 나갔다.
國防對備態勢 發展
c1990년대는 198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동구공산권 및
소련의 붕괴, 그리고 북한의 경제난 등은 북한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난
등 3중고로 체제적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우리 군은 여기에 연연하지 않고 21세기를 대비한 자주적 방위역량의 기반구축을
목표로 대북 억제전력과 국가안보전략 확보에 주력하였다.
c1990년대부터 종전의 율곡사업을 방위력 개선사업으로 연계하여
추진해 나갔고, 전쟁중 유엔군에 넘겨준 작전통제권중 평시작전통제권을 1994년 환수해 옴으로써 국방대비태세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각군본부의 계룡대 이전으로 작전지휘본부의 생존성과 육·해·공군 상호간의 협조체제를 바탕으로 한 통합전력
발휘를 용이하게 하였다. 1991년 걸프전에는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국군의료지원단과 공군수송단을 파견한 이래 분쟁지역에서의
평화유지군 활동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c그러나 북한의 상황은 우리와 달랐다. 북한은 새로운 천년에도
그들의 만성적인 3중고와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지난해 서해상에서 벌어진 연평해전은
우리 해군 전력의 우위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동안 추진해온 전력증강사업이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에 정부는 햇빛정책
추진에 있어서 종전 보다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는 북한을 남북정삼 회담과 국방장관 회담으로까지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힘을 바탕으로 한 튼튼한 국방력의 공이 컸다.
c따라서 오늘 우리는 건군 52주년을 맞아 "힘있는 민족만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듯이, 강한 군대만이 평화를 지탱해 나갈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처럼, 향후 통일 한국
시대에 대비한 작지만 강한 국방력 건설의 구현과 미래의 전장은 컴퓨터가 지배한다는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여 ''지식정보화
군''을 향해 매진해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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