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004
일 자
2003.07.20 16:45:28
조회수
3605
글쓴이
관리자
제목 : 타이거 장군 - 송요찬- (국방저널)



제목 : 타이거 장군 - 송요찬-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양영조

수록 : 국방저널, 2000.12월호


c 고 송요찬 장군은 1918년 충청남도 청양 화성면 매산리에서 농부인 아버지 송영달과 이머니 이씨사이의 2남 6녀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송장군은 성장하면서 꼬마장사로 불리울 정도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몸집이 거대하고 힘도 세었다. 동네어른들은 그를 보고 늘 장군감이라고 칭찬하면서 대견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웃마을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수학하였다. 이것은 그가 성인이 된 후 한학에 큰 조예를 갖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농사꾼으로 키울 아버지의 의사를 반대하고 화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c송장군이 보통학교 4학년이 되던 해인 1927년 3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세는 어려워졌다. 간신히 보통학교 6학년 과정을 졸업하게 된 송장군은 집안사정을 고려하여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돕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완고함으로 어렵게 봉산중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후 그는 한학에 매진하고자 2년여간 금강산의 한 암자에 들어가 사서와 삼경을 수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c이무렵 일제는 만주침략이후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름하에 침략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제는 근로보국단을 통해 한국청년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또 선만척식회사를 통해 충남 일원에서 만주로 보낼 농업 이민자 3천 여명을 강제로 모집중에 있었다. 이에 송요찬은 강제로 노무자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지원병에 응모하여 군인이 되는게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6개월의 훈련을 거친후 1939년 12월 일등병이 되었으며, 일제의 강요에 따라 나카무라 사다오란 이름으로 창씨개명도 하게 되었다. 그는 약 4여년동안 지원병훈련소에서 조교생활을 하면서 군조(중사)까지 진급하였으며, 그후 용산 소재의 조선군사령부 예하 제23부대로 배치되었다. 그는 1945년 1월 조장(상사)로 진급하여 훈련장교 보좌관을 수행하던중 환희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c해방 직후 미군정하에서 일군 육사출신인 이형근과 지원병출신 최경록이 소장 경력자들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시키기 위해 개별적으로 많을 사람들을 접촉하고 있었다. 송요찬은 특별지원병 제4기출신인 최경록을 찾아가 상의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영어교육을 받지못한 그는 학교교육이 끝나면 곧장 하숙집으로 돌아와 밤이 늦도록 공부를 하였다. 당시 군에서는 그의 독학열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친 송요찬은 1946년 5월 1일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하여 마침내 조국의 육군 장교가 되었다.

c당시 창군 초기 송요찬의 최초 보직은 제5연대(부산) A중대 소대장이었다. 그 뒤 부위(중위)로 진급하여 8연대 중대장에 보직되었다. 그는 신편중대를 맡아 지원병 시적의 훈련소조교의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철처한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는 스스로도 미군교리와 군사영어를 공부하여 미고문관들과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c1947년 2월 대위로 진급한 그는 제8연대 3대대장으로 보임되었다. 그는 강도높게 신병훈련을 실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대장병들은 호랑이같이 무서운 지휘관으로 인식하였고 그러한 인식으로 타이거 송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이무렵 군내의 좌익들이 중심이 되어 대대장을 구타하고 병사들을 선동하여 병기고를 파괴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으나 송대대장은 좌익분자들을 색출하여 초기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c제주도 박진경 제11연대장 암살시건으로 최경록중령이 연대장으로, 송요찬 소령이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암살범을 체포하는 등 질서를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군내의 좌익의 거두인 오일균 소령을 체포하는 등 숙군작업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 공로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재편성된 제9연대장으로 보임받아 제11연대로부터 48년 7월 24일부로 제주도 평정작전을 인계받았다. 송연대장은 일단 민심수습작전에 주력하면서 강력한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2단계 소탕작전을 완료하고 육본 계획에 의헉 9연대는 2연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대전으로 이동하여 부대 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49년 2월 1일 연대는 서울로 이동하여 수도사단(이준식대령)에 편입되었다가 강릉에 주둔한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속발령을 받았다. 그는 강릉에서 북한 38경비대가 월경하여 곳곳에서 만행을 자행하자 경비를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적의 예상 침투로를 철저히 차단하고 토벌작전을 감행하여 대부분의 유격대를 소탕하였다.

c그는 양양지역 작전등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7월 15일부로 대령으로 진급한후 9월 28일 제5사단(백선엽대령) 제15연대장에 보임되어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는 제주도에서의 경험을 살려 민심수습과 토벌작전을 병행하였다. 그는 작전중 팔에 관통상을 당하기도하였으나 항상 일선부대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c4월 18일부로 헌병사령부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당장 직면한 문제는 남북교역문제였다. 일부 고급장교들이 정보수집이라는 미명하에 북한과 상행위를 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각 지역을 조사한 경과 제보가 사실이란 것을 확인하고 문책하려 했으나 고위층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무산되었다. 그의 눈에는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었다. 정보수집을 하고 있었던 것은 북한쪽이었다. 그는 결국 보병학교 보수생으로 자원하여 교육을 받던 중 남침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헌병사령부로 긴급 복귀하여 낙오병수습, 군보급로 교통관리, 포로수용 등 임무를 수행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서울철수시 한국은행의 금괴상자 90여개를 구용서총재와 협의하여 사고없이 대전으로 운반하는데 성공하였다.

c그는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기까지 후방지역의 민심안정과 낙오병수습 등을 수행하다가 8월 10일부로 대구방위사령관의 직책을 겸임하게 되었다. 송요찬대령은 내무부 전국비상경비사령부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루면서 대구시민들과 피난들을 안정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9월 1일 수단사단장에 임명되었다.

c사단장으로 명령을 받은 송대령은 안강 기계부근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수도사단을 인수받았다. 수단사단의 임무는 기계-안강선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3일 미명 기계일대의 적이 전면적인 공세로 나왔다. 장병들은 진내전을 전개하면서까지 완강히 방어하였으나 결국 경주북방 마저 위협받았다. 송사단장은 더 밀려서 경주를 빼앗기게 되면 배후를 위협받게 되므로 절대 방어선을 고수하겠다는 결의하에 이 지역에서 적을 섬멸하기 위한 반격을 위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c그는 곤계봉에서 저지격파하기로 하고 제17연대에 현 방어선의 고수를 명령하였다. 이때 북한의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직접 이곳 전선까지 내려와서 독전하고 있었다. 결국 9월 7일부터 7일동안 무려 7차에 걸쳐서 전개되었던 곤계봉 공방전은 결국 아군 장병들의 피어린 투지에 의해 승리로 끝을 맺었다. 사단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기계를 동서로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위기를 극복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작전의 공로로 송대령은 9월 20일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 경주북방전투에서 수도사단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에 대하여 훗일 송장군은 "적이 인접부대와의 상호 연결균형을 취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너무 깊이 침투해 오다가 참패를 당한 겁니다"라고 회고하였다.

c수도사단은 낙동강선에서의 공세이전을 계기로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실지를 회복하였으며,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제3사단과 함께 양양을 점령하였다. 그후 사단은 원산으로 북진하던 도중 신고산 일대의 적을 격파하였다. 사단은 이 전투과정에서 제1대대장 장춘권소령이 복부관통을 당하는 등 일부 손실이 있었지만 적을 격퇴하고 개전이래 최대의 전과를 획득하였다. 즉, 1개 사단분의 장비를 노획한 것이었다. 전차 6대, 야포 4문, 박격포 11문, 기관총 530정 소총 8천정, 1개화차의 의료약품 등이었다.
사단은 3사단과 함께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원산에 동시 입성하였다. 원산 서측방에서 수도사단이 그리고 남측방에서 제3사단이 각각 진격한 것이다. 국군이 원산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약 9만에 달하는 잔류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입성하는 국군을 열렬하게 환영해 주었다.

c그후 사단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부득이 흥남을 통해 해상철수하여 묵호에 상륙하였다. 이때 아군은 한강 남안지역으로까지 진출한 중공군을 소탕하도록 작명을 하달하였다. 사단도 이 계획에 따라 강릉을 목표로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강릉남쪽주변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지원포병으로 격파하고 반격전을 개시하여 작전 4일만에 강릉에 돌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날 총참모장 정일권소장과 군단장김백일 소장이 지휘소를 방문하여 "송장군. 이 추위속에서 정말 고생이 많았소. 이렇게 수도사단이 목표지역을 제일 먼저 점령확보해주니 우리 국군의 체면을 크게 세워줬어요''라고 치하하였다.

c그 직후 맥아더원수의 한국전선 시찰시 수도사단을 방문하여 "제너럴 타이거 그러한 용기와 결의를 가지고 끝까지 잘 싸워주길 바라겠소"라고 격려하여 미 고위지휘관들 사이에 매우 용맹한 장군으로 알려져 타이거라는 별명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후에도 송요찬장군은 대관령에서의 중공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c사단은 10월 월비산 탈환작전에 성공하자 사단장이 월비산 정상에 올라가 "우리는 종이 호랑이가 아니다. 귀관들은 상승 수도사단의 참 호랑이자 동해의 호랑이임을 자부하라"고 외치면서 이날의 전공을 치하하고 격려한 다음 유공 장병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쾌승의 여세를 몰아 사단은 서부전선보다 80Km를 더 북진하여 전 전선에서 최선단에 진지를 점령한 사단이 되었다.

c동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사단은 11월 중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차출되었다. 사단장은 지리산에 도착하자 각 부대가 작전에 돌입하기에 앞서 ''민페근절''에 관한 지휘서신부터 각 예하대에 하달하였다. 제주도 반도소탕작전임무를 수행할 떼 군경들이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쳐 이로 인한 원성이 놓아 민군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직접 체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c지휘서신을 하달한 사단장은 제주도에서 장시 민심수습을 위한 선무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올렷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정훈 및 민사참모등에게 선무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지리산을 포위하고 있던 토벌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산정을 향햐 포위망을 압축해 나갔다. 사단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각 연대는 포위망을 압축해 가면서 산속에 잇는 가옥과 시설 등을 모두 소각하여 공비들이 다시는 거점으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주민들은 구호소로 소개시켰다. 송장군은 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였다. 공비들의 주요 조직이 붕괴되고 대부분의 잠복지가 토벌되었다. 52년 봄과 함께 지리산이 평정되자 송사단장은 작전임무를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인계하고 전선으로 복귀한 후 제1야전훈련소에서 교육과 부대정비에 임하였다.
이무렵 전선은 진지전으로 교착되어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수도사단은 제2군단 예하로 편입되어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지형능선, 621고지 전투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가 무려 3개월여 동안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작전을 끝난후 제8군사령부의 긴급 호출이 있어 내려가게 되었다. 그가 도착하자 뜻밖에도 이승만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방부장관, 군수뇌장성들과 미제8군휘하 미군장성들이 참석해 있었다.

c밴플리트 장군은 오찬에서 "오늘은 우리가 항상 존경해 마지않는 대통령각하께서 전쟁을 통하여 가장 용감하게 싸운 장성에게 손수 계급장을 달아 주시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동석한 모든 장성들이 모두 놀라는 표정을 했다. 그 순간 밴플리트 장군이 ''타이거 송''을 거명하였다. 그러한 속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면서 "송장군.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동안 용감히 싸워줘서 고맙습니다"하고 별 둘을 달아 주었다. 소장으로 진급한 송장군은 2년여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수도사단 장병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52년 7월 12일부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전속명령을 받은 것이다. 누구보다도 공비토벌 경험이 풍부한 송요찬 소장을 발탁하여 초대 사령관에 임명한 것이다.

c그러나 그는 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3개월여 만에 다시 수도사단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그후 중부전선에서 휴전회담을 앞두고 격전지였던 수도고지는 물론 금화, 평강, 철원을 잇는 철의 삼각지에서 적의 7.13 최후공세를 저지하고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는 그후 미육군참모대학에서 10개월동안 정규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3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약 2년여 동안의 재임기간중 창군 최초로 모든 부정행위를 척결하고 군단 운용의 정상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중장으로 진급된 후 약 10개월 동안 국방대학원에서 수학하고 57년 야전군사령관에 보임되었다. 그리고 59년 제11대 육군차모총장에 임명되었다.

c4.19혁명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는 과정에 있어서 송요찬중장은 계엄사령관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고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제2공화국의 산파역으로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오랫동안 군의 병폐인 부정부패의 요소를 발본색원함으로써 군의 참신한 기풍을 진작시켰다. 1960년 군생활을 마치고 예편한 후 5.16 직후 내각수반겸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군생활 동안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 2, 을지무공훈장 2, 미국 은성훈장 2개를 수여받았다. 그후 그는 인천제철사장으로 봉직하고 있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1980년 10월 6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정족산성 전투와 외규장각 도서 (국방일보)
이전글 화해협력 시대 주한미군의 역할 (국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