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양영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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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고 송요찬 장군은 1918년 충청남도 청양 화성면 매산리에서 농부인 아버지 송영달과 이머니 이씨사이의 2남 6녀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송장군은 성장하면서 꼬마장사로 불리울 정도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몸집이 거대하고 힘도 세었다. 동네어른들은 그를 보고 늘 장군감이라고 칭찬하면서 대견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웃마을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수학하였다. 이것은 그가 성인이 된 후 한학에 큰 조예를 갖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농사꾼으로 키울 아버지의 의사를 반대하고 화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c송장군이 보통학교 4학년이 되던 해인 1927년 3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세는 어려워졌다. 간신히 보통학교 6학년 과정을 졸업하게 된 송장군은 집안사정을 고려하여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돕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완고함으로 어렵게 봉산중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후 그는 한학에 매진하고자 2년여간 금강산의 한 암자에 들어가 사서와 삼경을 수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c이무렵 일제는 만주침략이후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름하에 침략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일제는 근로보국단을 통해 한국청년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또 선만척식회사를 통해 충남 일원에서 만주로 보낼 농업 이민자 3천 여명을 강제로 모집중에 있었다. 이에 송요찬은 강제로 노무자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지원병에 응모하여 군인이 되는게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6개월의 훈련을 거친후 1939년 12월 일등병이 되었으며, 일제의 강요에 따라 나카무라 사다오란 이름으로 창씨개명도 하게 되었다. 그는 약 4여년동안 지원병훈련소에서 조교생활을 하면서 군조(중사)까지 진급하였으며, 그후 용산 소재의 조선군사령부 예하 제23부대로 배치되었다. 그는 1945년 1월 조장(상사)로 진급하여 훈련장교 보좌관을 수행하던중 환희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c해방 직후 미군정하에서 일군 육사출신인 이형근과 지원병출신 최경록이 소장 경력자들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시키기 위해 개별적으로 많을 사람들을 접촉하고 있었다. 송요찬은 특별지원병 제4기출신인 최경록을 찾아가 상의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영어교육을 받지못한 그는 학교교육이 끝나면 곧장 하숙집으로 돌아와 밤이 늦도록 공부를 하였다. 당시 군에서는 그의 독학열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친 송요찬은 1946년 5월 1일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하여 마침내 조국의 육군 장교가 되었다. c당시 창군 초기 송요찬의 최초 보직은 제5연대(부산) A중대 소대장이었다. 그 뒤 부위(중위)로 진급하여 8연대 중대장에 보직되었다. 그는 신편중대를 맡아 지원병 시적의 훈련소조교의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철처한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는 스스로도 미군교리와 군사영어를 공부하여 미고문관들과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c1947년 2월 대위로 진급한 그는 제8연대 3대대장으로 보임되었다. 그는 강도높게 신병훈련을 실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대장병들은 호랑이같이 무서운 지휘관으로 인식하였고 그러한 인식으로 타이거 송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이무렵 군내의 좌익들이 중심이 되어 대대장을 구타하고 병사들을 선동하여 병기고를 파괴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으나 송대대장은 좌익분자들을 색출하여 초기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c제주도 박진경 제11연대장 암살시건으로 최경록중령이 연대장으로, 송요찬 소령이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암살범을 체포하는 등 질서를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군내의 좌익의 거두인 오일균 소령을 체포하는 등 숙군작업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 공로을 인정받아 중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재편성된 제9연대장으로 보임받아 제11연대로부터 48년 7월 24일부로 제주도 평정작전을 인계받았다. 송연대장은 일단 민심수습작전에 주력하면서 강력한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2단계 소탕작전을 완료하고 육본 계획에 의헉 9연대는 2연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대전으로 이동하여 부대 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49년 2월 1일 연대는 서울로 이동하여 수도사단(이준식대령)에 편입되었다가 강릉에 주둔한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속발령을 받았다. 그는 강릉에서 북한 38경비대가 월경하여 곳곳에서 만행을 자행하자 경비를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적의 예상 침투로를 철저히 차단하고 토벌작전을 감행하여 대부분의 유격대를 소탕하였다. c그는 양양지역 작전등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7월 15일부로 대령으로 진급한후 9월 28일 제5사단(백선엽대령) 제15연대장에 보임되어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는 제주도에서의 경험을 살려 민심수습과 토벌작전을 병행하였다. 그는 작전중 팔에 관통상을 당하기도하였으나 항상 일선부대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c4월 18일부로 헌병사령부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당장 직면한 문제는 남북교역문제였다. 일부 고급장교들이 정보수집이라는 미명하에 북한과 상행위를 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각 지역을 조사한 경과 제보가 사실이란 것을 확인하고 문책하려 했으나 고위층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무산되었다. 그의 눈에는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었다. 정보수집을 하고 있었던 것은 북한쪽이었다. 그는 결국 보병학교 보수생으로 자원하여 교육을 받던 중 남침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헌병사령부로 긴급 복귀하여 낙오병수습, 군보급로 교통관리, 포로수용 등 임무를 수행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서울철수시 한국은행의 금괴상자 90여개를 구용서총재와 협의하여 사고없이 대전으로 운반하는데 성공하였다. c그는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기까지 후방지역의 민심안정과 낙오병수습 등을 수행하다가 8월 10일부로 대구방위사령관의 직책을 겸임하게 되었다. 송요찬대령은 내무부 전국비상경비사령부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루면서 대구시민들과 피난들을 안정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9월 1일 수단사단장에 임명되었다. c사단장으로 명령을 받은 송대령은 안강 기계부근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수도사단을 인수받았다. 수단사단의 임무는 기계-안강선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3일 미명 기계일대의 적이 전면적인 공세로 나왔다. 장병들은 진내전을 전개하면서까지 완강히 방어하였으나 결국 경주북방 마저 위협받았다. 송사단장은 더 밀려서 경주를 빼앗기게 되면 배후를 위협받게 되므로 절대 방어선을 고수하겠다는 결의하에 이 지역에서 적을 섬멸하기 위한 반격을 위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c그는 곤계봉에서 저지격파하기로 하고 제17연대에 현 방어선의 고수를 명령하였다. 이때 북한의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직접 이곳 전선까지 내려와서 독전하고 있었다. 결국 9월 7일부터 7일동안 무려 7차에 걸쳐서 전개되었던 곤계봉 공방전은 결국 아군 장병들의 피어린 투지에 의해 승리로 끝을 맺었다. 사단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기계를 동서로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위기를 극복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작전의 공로로 송대령은 9월 20일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 경주북방전투에서 수도사단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에 대하여 훗일 송장군은 "적이 인접부대와의 상호 연결균형을 취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너무 깊이 침투해 오다가 참패를 당한 겁니다"라고 회고하였다. c수도사단은 낙동강선에서의 공세이전을
계기로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실지를 회복하였으며,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제3사단과 함께 양양을 점령하였다.
그후 사단은 원산으로 북진하던 도중 신고산 일대의 적을 격파하였다. 사단은 이 전투과정에서 제1대대장 장춘권소령이
복부관통을 당하는 등 일부 손실이 있었지만 적을 격퇴하고 개전이래 최대의 전과를 획득하였다. 즉, 1개 사단분의 장비를
노획한 것이었다. 전차 6대, 야포 4문, 박격포 11문, 기관총 530정 소총 8천정, 1개화차의 의료약품 등이었다.
c사단은 10월 월비산
탈환작전에 성공하자 사단장이 월비산 정상에 올라가 "우리는 종이 호랑이가 아니다. 귀관들은 상승 수도사단의
참 호랑이자 동해의 호랑이임을 자부하라"고 외치면서 이날의 전공을 치하하고 격려한 다음 유공 장병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 쾌승의 여세를 몰아 사단은 서부전선보다 80Km를 더 북진하여 전 전선에서 최선단에 진지를 점령한
사단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