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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8: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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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주국방과 전력증강 (국방일보)



제목 : 자주국방과 전력증강

저자 : 국방사부장 김현영

수록 : 국방일보,2001.05.28


c
1960년대말까지 우리의 국방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해왔었다. 미국에 의해 국군의 병력실링(ceiling)이 결정되었고, 군사력 건설은 물론 그 유지마저도 미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독자적인 국방정책이나 군사전략이란 의미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국군의 작전지휘권 조차도 우리의 뜻대로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국방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전략의 일환으로 고려되어 왔고, 우리의 전력은 미국의 이른바 ''총합전력(Total Force)''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국방비 내역을 보면, 1968년도 國防財源의 구성비율은 국내재원이 30.6%, 미국의 원조가 69.4%(無償軍援 53.4%, 對充資金 14.0%, 派越支援 2.0%)로서 여전히 우리는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형편이었다.
c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반적인 상황이 변화하였다. 미·소의 데탕트에 이어 미·중공의 화해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1969년 7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닉슨독트린''을 선언하자 아시아에서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주한미군의 철수와 미국의 對韓 군사원조의 중단, 그리고 주월미군의 철수에 따라 월남의 적화 가능성에 고무된 북한의 도발이 격화되자 한반도에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전력증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c우리 국군은 6·25전쟁 이후 이렇다할 전력증강 없이 현수준을 유지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전력증강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첫번째가 한국군현대화계획(1971∼1975)이고, 두 번째는 제1차 전력증강계획(율곡계획: 1974∼1981)이었다. 한국군현대화계획은 한·미간의 협의에 의하여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재원은 전적으로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였고, 율곡계획은 우리의 독자적인 계획과 재원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c한국군현대화계획의 배경을 보면, 1969년 ''닉슨독트린''이 선언된 후, 11월 미국방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워렌글잔이 정래혁 국방부장관을 방문하여 주한미군의 감축을 시사하였다. 1970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감축을 연기시키기 위하여 "한국군의 전력증강이 보장되면 1972년 이후에는 주한미군의 일부 감축도 고려할 수 있다"는 요지의 서한을 닉슨 대통령에게 발송하였다. 이에 대하여 닉슨 대통령은 5월의 회신에서 "1971∼1975년 기간중 한국군의 장비현대화를 위한 군원제공"을 제의해왔다. 1970년 7월 미국에서 열린 제3차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한국군의 장비현대화를 협의하고 방위산업 육성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어서 동년 7월부터 1971년 2월 기간에 한·미 군사실무자회의에서 한국군의 장비현대화를 위한 세부계획을 수립하였고, 1971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4차 한·미 안보협의회의에서 한국이 요구한 15억 9,600만달러 규모의 한국군현대화계획(1971∼1975)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1977년까지 2년이 연장된 한국군현대화계획은 집행결과 무상군원 9억 8,800만달러, 대외군사판매(FMS)차관이 5억 2,820만달러 총 15억 1,620만달러였다. 한국군현대화계획에 의하여 육군은 전차 470대, 어네스트존 4기, 8인치 자주포 99문, 나이키 6개 포대, 호크 24기, 발칸포 88문을, 해군은 구축함 2척, 고속정 4척, LVT 62척을, 공군은 F-5 전투기 134대, F-4 전폭기 16대 등을 도입하여 획기적인 전력증강을 하게 되었다.

c한편 미국의 대한정책이 소극적으로 변화한 반면, 북한의 도발은 격화되자 이제 우리 스스로 국방을 전담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자주국방 정책이 추진되었다. 1971년 1월 국방과학연구소가 탄생하여 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민간업체에 군사과학기술을 제공함으로써 방위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5년 월남의 공산화에 다급해진 정부는 방위세를 신설하여 방위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1970년대 말에는 한국형전투함, 다련장로켓, 곡사포와 포탄, 발칸포 등 기본병기를 국산화함으로써 전력증강사업 추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c그러나 한국군현대화계획은 지연되고 북한과 전력의 격차는 더욱 커저가자 국군의 전력증강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1973년 4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는 율곡계획을 수립하여 1974년 2월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독자적으로 전력증강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국군의 전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 시기의 전력증강은 현재 우리 전력의 토대가 되었다.
c미 군원이 1976년을 마지막으로 하여 중단되고 1977년부터는 국내재원만으로 국방비가 편성되고, 1970년대 말부터 기본병기를 완전히 국산화함으로써 자주국방의 기틀이 조성되었다. 또한 미 군원의 중단과 주한미군의 감축으로 미국의 입김은 약화된 반면, 국군의 월남파병과 경제력이 급격히 신장됨에 따라 우리의 위치는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1978년 11월 한·미 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함으로써 이제까지 미국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일방적으로 행사해오던 데서 벗어나 이제는 한국도 공동으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c이와 같이 우리는 1970년대의 위기를 호기로 삼아 온 국민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경제 건설과 군사력 건설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대미 의존적인 국방태세에서 벗어나 자주국방을 달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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