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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1 1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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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21>
<21>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파병(상)
[꿩먹고… 알먹고… / 2011.05.31]

동티모르 전통가옥의 모습
유엔이 설치한 동티모르 과도행정기구 로스팔로스 지방 본부 모습

1999년 10월, 건군 이후 두 번째로 1개 대대 규모의 보병부대가 `동티모르(East Timor)'에 파병됐다. 65년 베트남 파병 이후 34년 만에 이뤄진 전투부대 파병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생소한 이름의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띠모르 섬 동쪽 부분이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를 합한 정도의 면적에 110만 명(2008년 추산)의 인구를 가진 동티모르는 기나긴 투쟁 끝에 포르투갈 및 인도네시아 지배로부터 벗어나 2002년, `띠모르레스떼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한 신생국가다. 그러나 최근엔 띠모르 섬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가 매장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 띠모르레스떼의 독립투쟁

1500년대 초 인도네시아와 띠모르 일대에 최초로 진출했던 유럽 세력은 포르투갈이었다. 그러나 세력 다툼에서 밀린 포르투갈은 자바ㆍ수마트라 등에 이어 띠모르 섬의 서쪽을 네덜란드에 양도했다. 그 후 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면서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 차지가 됐지만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지배가 계속됐다.

70년대가 되면서 포르투갈은 식민지에서 주민들의 독립요구가 거세어지자 동티모르를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75년에는 주민선거에 의한 동티모르 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그해 12월 인도네시아가 무력으로 동티모르를 점령, 합병해 버렸다.

그때부터 인도네시아의 지배에 저항하는 동티모르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됐다.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과 달리 동티모르에 도로와 학교·병원을 비롯한 공공시설을 건설하는 등 대규모 투자사업과 함께 주민의 동화를 위해 많은 정성을 쏟았다. 또한 자국의 주민들에게 동티모르 이주를 적극 권했다.

그 같은 노력으로 동티모르의 경제와 생활여건은 빠른 속도로 향상됐다. 그러나 수하르토 대통령의 친인척 등 인도네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개발과 관련된 이권(利權)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동티모르인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더불어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 동티모르 인구의 90% 이상이 믿고 있는 가톨릭과 이주해 온 사람들이 믿는 이슬람의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주민들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인도네시아는 강압적인 통제와 탄압을 계속했다.

유엔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한 직후부터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동티모르인의 자결권 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82년까지 연례적으로 채택해 왔다. 그러나 유엔의 결의안을 무시하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제재는 없었다. 그 이유는 미국ㆍ오스트레일리아 등 관련 국가들이 확고한 반공정책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를 두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동티모르의 저항세력에 대한 경계도 있었다.

91년에는 동티모르 사태가 세계적인 문제로 비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에 저항하다가 사망한 청년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모인 군중을 향해 인도네시아군이 발포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270여 명이 사살되고, 250여 명이 실종됐으며, 370여 명이 부상당한 유혈사태로 비화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사건을 전후해 저항세력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계속됐다. 국제인권단체는 인도네시아 점령기간 동안 동티모르 인구 80만 명 중 4분의 1인 20만 명 정도가 사살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95년 인도네시아는 아시아에 밀어닥친 금융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장기 집권해 오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퇴진하고 하비비 부통령이 그 뒤를 이었다.

권력기반이 취약했던 하비비 정부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구제금융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의 으름장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는 “주민투표로 동티모르 장래를 결정하자”는 유엔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유엔은 99년 6월, 동티모르에서 주민투표를 감독할 파견단을 설립했다.

인도네시아는 점령 기간 동안 자신들이 동티모르 발전을 위해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그들에게 유리한 투표결과를 기대했다. 그러나 9월 4일에 확인된 투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예상 외로 주민의 98.6%가 투표에 참가했으며, 78.5%가 독립을 찬성한 것이다.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은 인도네시아 군부는 “승복할 수 없다”며 강경한 자세를 고수했다. 그 사이에 친인도네시아 성향의 민병대(militia)가 독립을 찬성한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보복과 살인, 방화ㆍ약탈을 자행했다. 그로 인해 1000명 이상의 독립세력이 희생당하는 대규모 인명 피해와 함께 26만여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 한국군 파병 배경

동티모르 유혈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자 유엔은 “다국적군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9월 6일, 한국을 비롯한 회원국들에게 참가 여부를 비공식으로 질의했다. 오스트레일리아ㆍ뉴질랜드ㆍ영국ㆍ프랑스 등이 공개적으로 파병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한국은 자원부국인 인도네시아와의 방산협력 및 우호관계를 고려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며칠 후인 9월 12일, 뉴질랜드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 정상회의가 열렸다. 한국의 김대중, 미국의 클린턴, 중국의 장쩌민, 일본의 오부치 등 주요 정상들이 참석했다. 회의 전날부터 각국의 정상과 회담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은 동티모르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인도네시아의 결단을 촉구했다. 여러 외신과의 기자회견에서도 김 대통령은 “인도네시아가 유엔의 평화유지군 파병을 수용해야 한다”며 한국군의 파병방침을 시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날 저녁, 극적인 변화가 이뤄졌다. 오전까지만 해도 완강히 버티던 하비비 대통령이 유엔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동티모르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하비비의 심경 변화는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이 주효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절차

대통령의 파병의지 표명이 알려지자, 망설이고 있던 국내의 파병논의도 활기를 띠게 됐다. 당시 야당은 파병을 적극 반대했다. 그 이유는 유엔의 요청이 전투부대 파병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과 인도네시아와의 우호관계를 고려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교민단체는 “우리 군의 동티모르 파병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조선일보 1면에 게재하기도 했다.

정부도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해 국방부 정보본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인도네시아에 파견해 위란토 국방부장관 겸 통합군사령관 등 군부의 실력자들을 차례로 만나 협조를 구했다. 그들은 한국이 파병 전에 자신들과 협의를 가져준 데 대해 감사하며 한국군이 파병될 경우 별도의 연락단을 편성해 정보를 제공하는 등 적극 협조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주한ㆍ주유엔 인도네시아의 대사도 “한국의 파병을 적극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파병에 대한 국내의 여론도 찬성 70~50%, 반대 20~40%로 호의적이었다. 그렇지만 야당은 정부가 제출한 파병동의안의 상임위원회 통과를 끝까지 저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된 파병동의안은 9월 28일, 야당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160명 중 158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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