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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1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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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03>
국난 극복사<3>삼국간 각축전
[동맹·파기·보복 200년 세월 신라, 中과 일관된 외교 유지 / 2011.05.26]

삼년산성 사진
삼국시대의 전투 장면(상상도) 사진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는 삼국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부왕이 이룩한 대제국의 수성(守成)을 위해 장수왕이 ‘북수남진정책’을 추진하며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200여 년에 걸친 삼국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됐다.

▶ 동맹, 대외관계의 변화와 새로운 선택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었다. 나제동맹(433)의 결성이다. 직접 위협을 받던 백제와 고구려의 휘하에서 벗어나려는 신라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475년 9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 장수왕은 3만의 군사로 한성(위례성)을 함락시켰고, 도망치던 개로왕은 붙잡혀 살해됐다.

위기에 직면한 백제는 신라와 더욱 밀착했다. 동성왕(479∼501)은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로 동맹을 공고히 하며 중흥을 도모했다. 성왕(523∼554)은 협착한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겨 국가 분위기를 일신하며 중국의 남조와 일본과의 관계에 신경을 썼다. 드디어 551년 신라와 연합해 오랜 숙원인 한강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내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553)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성왕은 그 이듬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쳤다. 관산성(충북 옥천)이 격돌지였다. 처음엔 신라가 불리했지만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武力)의 지원을 받은 삼년산성의 신라군이 기습적으로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제 한강유역의 신라 영토화가 확고해졌다.

▶ 동맹의 파기, 백제의 보복전

백제는 타격을 입고 위덕왕(554∼597)이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했지만 신라군의 격퇴로 보복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30여 년간 절치부심한 백제가 침공을 재개한 것은 무왕(600∼640) 때다.

무왕은 602년 8월 신라의 아막성(남원 운봉)을 침공한 이래 40년 동안 무려 11회에 걸쳐 침공을 단행하며 신라를 궁지로 내몰았다. 동맹의 파기가 몰고 온 처절한 보복전이었다. 그는 아막성을 쳐서 청주와 괴산 일대를 접수하고, 다시 624년 옛 가야 지역을 공략해 속함성(함양), 기잠성(합천), 용책성(단성) 등 지리산 동북의 요충지들을 수중에 넣었다.

무왕은 중국과의 외교에도 적극적이었다. 위덕왕이 598년 수(隋)문제가 고구려를 치려 할 때 이를 재빠르게 간파하고 향도를 자청한 적이 있지만, 무왕 자신도 양제의 고구려 침공을 눈치 채고 607년 사신을 보내 고구려 원정을 요청했다. 수양제는 만족해하며 무왕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도록 격려했다.

611년 고구려 침공이 임박한 것을 알아챈 무왕은 또 사신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군기(軍期)를 청했다. ‘개전일’ 운운하며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듬해 수 육군(六軍)이 요하를 건넜을 때 돕겠다던 것은 말뿐이었고 백제는 신라 공격에만 열을 올렸다.

이처럼 국가 간의 신의에도 충실하지 못한 무왕의 이중적인 양단책(兩端策)은 후계자 의자왕도 다르지 않았다. 618년 당 왕조가 건립되자 무왕이 직접 과하마를 보내 동맹을 맺고자 했지만, 삼국의 외교 공방전이 치열하던 상황에서 결국 당태종은 양다리를 걸친 백제를 배제했다. 신뢰 없는 형식외교의 낭패였다. 이로써 삼국 중 가장 열세인 상황에서 동맹관계가 필요했지만, 백제는 당의 불신을 자초했고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도 힘들었다. 한반도 서남부에서 고립된 채 백제는 오직 왜와의 관계에 만족해야 했다.

▶ 또 다른 위기, 고구려의 보복전

백제를 배반한 신라가 한강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후 보복전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 중에서 단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도 분명했다. 다만, 복수심에 불타는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한 국가보위전을 치러야 했다.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무려 100여 년에 걸친 보복전이었다.

7세기 초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했다. 603년 8월 진평왕은 북한산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을 1만의 군사로 격퇴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다시 몇 년 후 온달을 파견해 남한강 상류를 회복하고자 했다. 아단성 전투에서 온달이 전사함으로써 고구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실 당시 고구려는 대륙 정세를 도외시한 채 무모하게 신라 공격에 몰두했던 것이다.

589년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할 무렵, 한강을 장악한 신라가 재빨리 수와 외교를 맺었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중국 왕조와의 친선이 더 이상 곤란한 상황이었다. 비록 신흥세력인 북방의 돌궐과 연결했지만 고구려로서는 대제국인 수나 당(唐)을 대항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영양왕은 598년 수의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해 30만의 수문제가 침공하는 빌미가 됐고, 다시 양제의 100만 대군의 침공(612)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왕조 말기에는 쿠데타로 집권(642)한 연개소문이 정치적 취약성을 만회하고 또 제국을 꿈꾸던 터라 시종 당과 맞서 대중(對中) 관계가 순탄할 리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의 아킬레스건은 내정에 있었다. 고구려는 6세기 중엽부터 내부의 잇따른 정쟁으로 왕권이 크게 위축됐다. 비옥한 문화의 도시 평양성에서 귀족들은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연립정권을 성립시켰다. 장수왕의 귀족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도 평양 천도 이후에 새로운 신진 귀족세력이 진출했고, 정치세력의 개편은 귀족관료의 내부갈등을 심화시켰다. 왕조 말 연개소문이 국정을 전제하다 왕조 몰락을 자초한 단초가 이미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환, 또 다른 동맹의 선택

신라는 위기의 해법을 대중외교에서 찾았다. 주변 세력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황을 탈피할 유일한 방도가 그것이었다. 세속오계를 만든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원군을 청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는 진(陳)나라로 유학했다가 수가 통일한 후 10년이 지난 600년 귀국했다. 현지 사정에 밝은 원광은 608년 진평왕의 명에 따라 수양제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요청하는 국서를 썼다. 3년 뒤에 신라는 이 걸사표(乞師表)를 보내 양제의 결단을 촉구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612)이 실패한 그 이듬해 수나라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때 원광은 황룡사에서 베풀어진 백고좌(百高座)에 나가 경전을 강의하기도 했다.

신라의 대중외교는 수가 몰락한 바로 그해인 618년 당이 건국된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625년, 신라는 고구려가 당으로 가는 서해안 항로를 막고 자주 국경을 침입한다고 당에 호소했다.

이른바 공도(貢道)의 차단은 당의 조공·책봉질서에 반한 도전 행위로 당에 강압책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백제가 신뢰를 지키지 않거나 고구려가 기회를 타 선제공격을 가하며 맞선 것과 달리, 신라는 일관된 자세를 유지했다.

신라는 642년 이후 고구려와 동맹까지 맺은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에는 말갈과 연합한 고구려의 공격으로 생존 자체를 위협받았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과연 절묘한 책략이 나왔다. 바로 핵심국가와 일관된 관계를 유지해 온 신라의 외교적 신뢰에 바탕을 둔 ‘군사동맹’, 바로 중원의 강국 당(648)과 주변국 일본(647)과의 연합이 그것이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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