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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8 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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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7>
<7>베트남 파병 한국군의 활약
[주민과 베트콩 `분리-차단-격멸' 적중“역시 따이한”/ 2011.02.08]

주월 한국군사령부가 대민지원 차원에서 건립해 기증한 팔각정
수도사단(맹호부대)의 작전지역 장병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1966.10.21)
베트남전쟁 당시 촌락 모형과 지하 군사시설의 단면도(용산 전쟁기념관 디오라마)
중대전술기지의 모형.(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디오라마)

▲ 베트남 전장(戰場) 환경의 특수성

베트남전쟁은 6·25전쟁과 같이 이념(理念)에 기초를 둔 동족 간의 전쟁이었지만 그 양상은 전혀 달랐다. 정규전 위주였던 6ㆍ25전쟁과 달리 게릴라전에 의해 수행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000여 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와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 지배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의식,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과 함께 게릴라전을 발전시키게 됐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점이나 근거지를 철저하게 은폐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논에서 일을 하는 농부도 기회가 되면 무장세력이 됐다가 연합군의 수색이 시작되면 다시 농부가 되는 변장술을 구사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승려도, 여성도,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의 입장에서 볼 때 베트콩은 있는 곳도 없었고, 없는 곳도 없었다.

▲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통제권 행사

한국군 파병 당시 정부는 예산과 보급체제 등 파병병력 지원을 위한 대책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현지의 작전은 물론 모든 보급과 장병의 해외근무수당까지도 미군이 지원하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역시 주월 미군사령관이 갖는 것이 거의 당연시되고 있었다.

‘전쟁원칙(Principle of War)’에 비춰 볼 때도 동일한 목적을 가진 부대가 지휘통제를 일원화하는 ‘지휘통일(Unity of command)’ 원칙은 원칙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본국의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부 즉 미군이 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했다.

반면 전쟁 당사국인 남베트남은 미군의 작전통제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나아가 한국군 역시 미군의 작전통제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견제했다. 베트남 사람들의 외세에 대한 저항과 뿌리 깊은 불신감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 같은 여건하에서 파병 관계자들은 현지 미군사령관과 협상을 통해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어 파병된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소장 역시 미군의 집요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작전권을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한국군은 남베트남군과 같이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국군이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함으로써 얻는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파병된 한국군이 용병시비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근거가 된 것이다. 또한 한국군은 특유의 독자적인 전술로 작전성과를 증대시키고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다. 나아가 차후 해외파병의 중요한 선례가 됐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 한국군의 전술

한국군에 앞서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은 강력한 병력으로 게릴라의 예상 은거지를 수색해 그들을 격멸하는 군사력 위주 정규전 방식의 작전을 전개했다. 반면 6·25전쟁 이전부터 북한군의 게릴라전을 경험했던 한국군은 베트콩을 주민과 분리시켜 격멸하는 ‘분리-차단-격멸’의 3단계 작전을 구사했다. 주민과 게릴라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水魚之)’ 관계로 규정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유격전술에 입각한 베트콩의 전술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한국군이 채택한 3단계 작전개념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민 속에 섞여 있는 베트콩을 주민과 분리시킨 후 그들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국군은 주민들의 거주지역 외곽에 중대급 규모의 전술기지(Tactical Base)를 설치했다. 이어 기지를 중심으로 수색정찰과 매복으로 주민과 베트콩을 차단하면서 점차 평정지역을 늘려가는 방식의 작전을 구사했다.

이에 대해 미군들은 “분산된 중대전술기지가 적에게 각개격파될 수 있다”며 우려했다. 그러나 중대전술기지는 점차 한국군의 독특한 전술로 정착되면서 많은 성과를 거뒀다. 특히 1966년 ‘둑꼬(Duc Co) 전투’와 67년 2월, ‘짜빈동(Tra Binh Dong) 전투’를 통해 그 유효성을 입증하자 미군의 군사전문가들도 한국군의 전술을 인정하게 됐다.

▲ 한국군의 민사심리전

전술기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군의 작전이 성과를 거두려면 지역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한국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채명신 사령관의 훈령에 따라 전 장병이 민사심리전 요원이 돼 적극적인 민사작전을 전개했다.

한국군의 민사심리전은 남베트남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함은 물론 그들의 생활 관습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적극적인 대민지원을 전개해 그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특히 의료지원, 농경지원 및 구호, 주민들의 자립능력을 배양시키는 자조사업, 대민건설지원, 태권도 및 유도 보급 등의 대민지원활동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은 “유사한 문화와 풍습을 가진 동양인이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들과 같이 “동족간의 전쟁을 겪었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이 결합돼 매우 호의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보조수단으로부터 군사작전으로 달성할 수 없는 부분까지 담당하는 핵심적인 분야로 자리 잡게 됐다.

반면 미군의 민사심리전은 한국군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예산을 투자해 대규모로 수행됐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열지 못함으로써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베트남전장의 영웅들

정부는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웨스트모랜드 주월 미군사령관 등 외국군 3명을 포함, 모두 15명의 장병에게 태극무공훈장의 영예를 수여했다.

전투에 직접 참가해 세운 공로로 맨 먼저 태극무공훈장이 추서(追敍)된 장교는 제2해병여단 제3대대 정보장교였던 고(故) 이인호 소령이었다. 그는 뚜이호아 지역의 동굴수색 작전시 수색조를 직접 지휘하던 중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안고 전사하면서 부하들을 구하는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인 영웅이었다. 이어 각각의 전투에서 수훈을 세우며 전사한 지덕칠 하사, 송서규 중령, 최범섭 소령, 임동춘 중위와 함께 파월 훈련 중 전사한 강재구 대위를 포함 총 6명의 영웅이 진급과 함께 추서됐다.

생존영웅으로는 이종세 중사, 정경진 대위, 신원배 소위, 이무표 중위 등과 함께 채명신·이세호 사령관에게 수여됐다. 그 외에도 160명의 장병에게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으며 2만여 명의 장병이 충무·화랑·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미국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도 있었다.

그러나 훈장을 받지 못한 많은 장병 역시 국가의 명을 받아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묵묵히 소임을 다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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