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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9 09: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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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6>
<16>국군 세계를 향한 도약 (1980년대)-중
[자주국방 역량 `쑥~' 기회를 성공으로 세계속 국군 위상 `UP' / 2011.04.19]

우리 군은 1980년대에 들어와 변화된 안보환경을 고려, 국방목표를 자주국방 태세 확립을 위해 ‘적의 무력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적인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로 재설정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방위산업 육성과 제2차 전력증강 계획(율곡사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1990년 한국형 합동군제 형태로 군령(軍令)·군정(軍政)체제를 확립해 3군 통합 차원의 ‘자주적인 군사전력’ 발휘를 용이하게 했다. 이로써 군은 한반도와 아시아를 벗어나 1991년 걸프전 파병 및 1993년 소말리아 파병을 발판으로 세계 속의 국군으로 한층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북한의 T-72, 62전차를 압도하는 K1 전차(일명 88전차)
국산 전투기 F-5 제공호가 편대 비행하고 있다

【통합 전투력 극대화】

▶ 자주국방 역량 강화

제1차 율곡사업(1974∼1981년)에 이어 제2차 율곡사업(1982∼1986년)을 통해 자주국방의 기반을 조성했다. 전력증강사업의 제2단계인 전력정비사업은 조기경보체제 구축과 전쟁 지속능력의 확장 그리고 유·무형 전력의 균형적인 발전을 통해 자주적인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즉, 주요 무기의 국산화를 통한 첨단 국방과학기술과 방위산업의 기반을 다져 기술집약형 전력구조로의 개선 및 각군과 전장 기능별 전력의 균형적인 발전을 통해 통합전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1982년 하반기부터 500MD 헬기 생산에 이어 F-5 제공호를 생산해 아시아에서는 세 번째 항공기 생산 국가가 됐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방위산업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오늘날 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와 무기체계는 거의 이 기간 중에 추진된 전력증강사업에 의해 이뤄졌다.

또 전투물자 확보 측면에서도 전투 예비탄약 및 유류를 확보하는 등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자주포·한국형 전차 및 장갑차의 양산, 잠수함 및 F-16 전투기 기술도입 생산이라는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방위전력의 확보와 억제전력 기반이 조성됐다.

군사외교 활동도 그동안 소원(疏遠)했던 제3세계 비동맹 국가와의 관계를 벗어나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해 중동·아프리카 등 40여 개국과 군사교류를 통한 상호유대와 군사협력을 다졌다.

【한국군 위상 다시 확인】

▶ 레바논 파병 요청 검토 및 해·공군 연합훈련 참가

2006년부터 레바논에 파병돼 ‘평화의 하얀 손’으로 평화유지활동을 하고 있는 동명부대는 사실상 1980년대 초 파병이 검토된 적이 있었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한 후 10년이 지난 1982년 10월, 레바논 전쟁 전후 치안유지와 평화정착을 위해 레바논 정부로부터 다국적 평화유지군 파병 요청을 받았다. 당시 정부는 파병 규모와 기간 등 신중한 검토 끝에 파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록 파병은 되지 않았으나 한국군에 대한 국제적 인식은 강한 정신력과 잘 무장되고 훈련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해군은 1990년부터 참가하고 있는 환태평양군사훈련(RIMPAC)을 통해 한국군의 위상을 제고하고 있다.

이 훈련은 태평양 연안국가의 해상교통로 안전 확보와 테러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미 해군 주관으로 실시하는 대규모 해상 연합훈련이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해상작전의 반경이 태평양으로 확대되고, 현재 지중해에 이르고 있다. 공군 또한 1992년부터 다국적 공군 연합훈련인 ‘레드 플래그(Red Flag)’에 참가하고 있다.

【서울 올림픽 성공 지원】

▶ 스포츠를 통한 국군위상 제고

‘1986년 아시아 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의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각종 대비 및 지원계획을 완벽하게 시행함으로써 대회의 성공을 보장했다.

대회 기간을 전후해 한미연합 방위태세 및 수도권과 주요 경기장, 국가 주요시설에 대한 감시·경계 등을 강화했다. 아시아 경기대회 시에는 병력 3000여 명, 물자 4만5000여 점 등을 지원했고 개회식 축하비행·고공낙하·태권도시범 등 다채로운 묘기를 펼쳤다. 서울올림픽 때는 안내 및 통역, 경기 진행보조 및 의무요원 등 1만여 명의 병력과 항공기·함정 등 장비와 물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상무’로 불리는 국군체육부대의 보이지 않는 땀의 결실이 뒷받침됐다. 국군체육부대는 1970년대까지 각군별로 운용되던 운동팀이 1980년대에 접어들어 통합 창설됐다. 선수 장병들은 ‘86 아시안게임’에 40명이 참가해 금메달 10개 등 총 22개의 메달을 획득, 종합 2위 달성에 기여했다.

또‘88 서울올림픽’에는 52명이 참가해 금메달 3개 등을 획득했다. 이어 1995년부터 시작된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참가해 스포츠를 통한 군 체육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는 곧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바탕으로 세계 속의 국군으로 성장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 안보협력 더욱 강화】

▶ 연합 및 합동작전 능력 극대화

한미동맹을 통한 안보 협력은 19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갈등을 극복하고 더욱 강화됐다.

한미 제1군단은 1980년 3월 한미야전군사령부(ROK/US Combined Field Army)로 확대·개편됐는데, 미 제2사단과 한국 육군 제5·6군단을 작전통제했다. 이 사령부는 세계 유일의 연합야전군사령부였을뿐만 아니라 규모 면에서도 세계적이었다.

임무는 서울을 포함한 서부전선을 방어하면서, 한반도에서 작전과 훈련을 주도해 한국군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92년 한미야전군사령부가 해체됨으로써 비로소 한국 방위에 있어 미군의 역할이 주도적인 것에서 보조적인 것으로 변경됐다. 한미연합군사령부와 더불어 한미 제1군단 및 한미야전군사령부 운용 경험은 한국군이 세계적 강군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또 군 구조와 지휘체계도 개선됐다. 1989년 7월 각군 본부가 계룡대 지역에 통합됨으로써 합동성 강화를 통한 전력 발휘 여건이 보장됐다. 그리고 1990년 10월 합동군제 합동참모본부를 창설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육·해·공군 작전부대를 지휘하는 최고 군령기관으로 위상을 정립했다. 이어 통합전력 발휘 보장을 위해 하부 구조의 개선으로 국군지휘통신사령부·정보사령부·심리전단 등을 창설했다.

결론적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 후 1970년대는 자주국방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1980년대는 방위력 개선사업과 함께 한미연합방위 태세를 구축한 시기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비축된 역량은 1990년대에 동서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민족·자원·종교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증가된 국제분쟁에 국군은 다국적군 또는 평화유지군으로 세계평화 유지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국가 위상 제고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걸프전 파병과 소말리아 파병을 시작으로 국제평화유지군으로 활동을 전개해 명실상부한 아시아 지역군에서 세계 속의 국제군으로 그 날개를 활짝 폈다.

<오홍국 군사편찬연구소 해외파병사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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