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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1 15: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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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2>
<2>신라의 당나라 파병과 고려 일본 원정
[국제정세 맥 짚고 국익-안보 두토끼 사냥 / 2011.01.04]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932번 외침(外侵)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한 적이 없는 평화를 추구하는 민족이다' 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민족은 주변국의 침략에 대해 방어에만 급급했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를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은 주변국의 위협 속에서도 국제정세에 잘 대응하면서 국익을 추구한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국군의 글로벌 피스 코리아 발자취를 돌이켜 보기 전에 역사상 대외 파병을 통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국익을 추구했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역대 파병사 중 고구려의 상무정신과 통일신라의 당나라 파병, 고려 시대의 일본 원정에 대해 조명해 본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모사도
신라의 대당 파병 추정도

▲ 만주지역을 호령했던 고구려 상무정신(尙武精神)

오늘날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에 있던 고구려(37∼668)는 주변 민족과의 전쟁을 통해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특히 ‘무용총 수렵도(舞踊塚 狩獵圖)’에서 볼 수 있듯이 상무정신은 곧 고구려의 근본정신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광개토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만주의 요하 이동(以東) 지역 및 송화강 중상류지역 이남으로부터 임진강 이북으로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위상을 확보하면서 동북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 통일신라(676∼918)의 당(唐) 나라 파병 : 819년 ‘이사도의 난’ 진압

삼국사기 본기에 의하면, ‘헌덕왕 11년 7월, 당나라 헌종은 운주(지금의 산동성 제령도) 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어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雄元)이 갑병(甲兵 : 일급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중국 대륙은 혼란의 시대로 당나라 중앙정부는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지방의 번진(藩鎭)세력들은 지역을 점유하며 중앙정부와 대립했고 군사력을 가진 절도사들이 지역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했다. 8세기 중엽 ‘안록산의 반란(755∼763)’과 여러 번진의 반란이 이어졌고, 특히 헌종대(憲宗代) 819년 ‘이사도의 난’이 발생했다. 일본은 헤이안(平安) 시대로 문무왕 8년(668)에 신라와 국교가 성립돼 양국은 8세기 후반까지 사신을 교환했다. 9세기에는 신라 상인과 해적들이 활약해 양국 간에 사적인 교류만 이뤄졌다.

신라의 대당 파병은 당시 국제 정세로 보아 의미가 있다. 즉,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은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활용해 이뤄졌는데, 당시 한반도는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리고 통일 후 나-당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고 상호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기에 파병이 이뤄진 것이다.

여기에서 파병 시기를 전후해 동북아 해상무역을 개척했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이사도의 난을 진압한 신라군과도 관련이 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장보고는 20대 초반인 헌덕왕 12년(810)에 당나라 산동반도 서주(西州)로 건너가 무령군중소장(武軍中小將 : 무령군 절도사 휘하의 현재의 사단장급)이라는 벼슬에 올라 819년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는 전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이후 828년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주요 뱃길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 무역 장악은 물론 동남아에 이르는 해로와 안보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당시 신라의 당나라 파병은 국제 정세를 잘 활용하고 파병을 통해 국제적 안목을 높이고 미래를 개척했던 소중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수 있다.


▲ 고려의 일본 원정

고려(918∼1392)는 500여 년 동안 북방 이민족과의 수많은 전쟁을 통해 그들의 침략에 정면으로 맞서서 격퇴하거나 자주적인 외교관계를 통해 이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즉, 여-요(麗遼), 여진정벌, 여-몽(麗蒙), 홍건적·왜구토벌전쟁 등을 거치며 이를 극복해 왔다.

고려는 몽골족이 대륙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해 13세기 초부터 중엽에 이르는 근 30년 동안 아홉 차례 전쟁을 한 결과 군신관계를 수락해 자주성을 상실한 적도 있다. 그리고 여-원(麗元) 연합군을 구성해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을 단행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끊임없는 팽창정책으로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복속을 요구했다.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군사력으로 일본 정복을 추진하면서 고려에 군사적 협조를 요청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서인한의 ‘한국연합작전사’(2009)에 따르면 일본 원정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원정은 1274년 10월 3일 합포항(지금 마산항)을 떠나 쓰시마(對馬島)로 향했다. 고려-원 연합군은 총 4만여 명으로, 원군은 이른바 몽한군(蒙漢軍 : 몽골인+화북지역 한족) 2만5000명, 고려는 전투병력 8000명과 지원부대 6700명을 동원하고 전함 900척을 새로 건조하거나 군선으로 개조했다.

고려-원 연합군은 10월 20일 규슈의 하카다 만에 진입해 3개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이때 일본군은 1만여 명이었다. 고려군은 궁시(단궁으로 사용이 편리하고 사거리가 긴 활)로 무장해 체계적인 보병 중심의 집단전술과 근접전으로 일본 기마무사(騎馬武士) 중심의 개인전술을 압도했다. 그리고 몽한군의 화약무기인 철포(鐵砲 · 폭발탄)는 위력을 발휘해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작전 중 예상하지 못했던 폭풍우의 피해와 내부적으로 피정복지의 군사를 강제 동원한 데 따르는 다국적군 지휘운용상의 문제점과 군수지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11월에 철군했다.

제2차 일본 원정은 1차 원정이 실패한 후로 7년이 경과한 뒤에 다시 추진됐다. 1281년 5월에 합포항을 출발한 병력은 4만여 명으로 고려군은 2만5000여 명, 몽한군은 1만5000여 명이었다. 나중에 강남군 10만여 명이 전선 3500척으로 참전했다. 연합군은 6월 초에 일본 하카다 만에 도착했는데, 일본군은 1차 원정 때와는 달리 해안선을 따라 석축(石築) 구조물을 축조해 방어에 임했다. 연합군은 지상전에는 승리했으나 강남군의 지연 도착과 뜻하지 않은 전염병, 8월 초의 초특급 태풍으로 인해 많은 손실이 있었다. 결국 연합군은 작전을 중지하고 합포로 철군하고 말았다.

두 차례의 일본 원정으로 고려는 인력 동원과 군량 조달, 군함 건조 등으로 국력이 피폐해졌다. 그러나 도움이 된 것도 있었다. 군량 조달을 위해 원나라의 선진 농법인 우경(牛耕:소가 끄는 쟁기 이용, 당시 고려는 사람이 끄는 소형 쟁기를 이용)의 도입으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의 도입은 새로운 군역체제의 출발로 일본 원정을 통해 얻은 당시 군사적 전투경험 계승과 함께 14세기 중엽 북방의 홍건적 토벌과 대마도 정벌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이 됐다.

아울러 일본 원정은 이를 단행하지 않았을 경우 우려됐던 ‘고려 왕실을 해체하고 원나라의 직할 성(省)으로 편입하자’는 주장을 잠재움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일본 원정은 명분보다 국익이 많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홍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해외파병사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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