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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8 09: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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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선일보]나와 6·25-미니 전사(戰史)[3] 북한의 전쟁 준비
북한, 49년 소련 무기로 무장… 소·중에 지원 약속 받아내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기점이 되는 때는 1949년 3월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쉬티코프 소련 대사를 계속 압박한 끝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이 회담은 수십년 동안 경제·문화 관련 회담으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1994년 소련의 일부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이 회담에서 다뤄진 핵심 내용이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서는 옐친 대통령이 소련의 비밀외교문서 중 6·25 전쟁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해 일명 '옐친문서'라고 불린다.

이 회담에서 김일성은 '즉각적인 무력 통일'을 주장했고, 스탈린은 "아직 때가 아니다"며 만류하는 입장이었다. 김일성은 당장 전쟁을 일으키는 데 대해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두 개의 큰 선물을 받았다. 우선 북한이 추후에 전쟁을 일으킬 경우 소련이 이를 지지하겠다는 것. 둘째는 북한군에게 현대적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그해 5월 이후 북한에는 소련의 최신 무기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청진항과 원산항 등 항구에는 자주포와 박격포, 탄약 등을 실은 배들로 가득 찼고, T-34 전차 등은 철도를 통해 북한 땅으로 들어갔다.

공산세력은 위장 평화전술도 구사했다. 소련과 북한은 1948년 12월 25일 소련군 전면 철수를 국내외에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남측을 향해 평화통일 논의를 하자고 손짓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2월 소련군 총참모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는 여전히 소련군 4000여명이 몰래 남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기갑과 포병, 공병 등의 병과를 가진 병력들로 북한군의 전투 능력을 높이는 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북한은 중국으로부터는 주로 병력 지원에 대한 보장을 받았다. 중국에는 조선인들로 구성된 '조선의용군' 3개 사단 병력, 약 5만명이 있었다. 김일성 특명을 받은 김일 특사는 1949년 5월 마오쩌둥을 만나 이들 조선의용군 병력을 입북(入北)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조선의용군 5사단과 6사단 병력은 1949년 여름과 가을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12사단은 1950년대 3월에 입북했다.

1949년 10월 중공이 탄생하자 김일성은 전쟁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의 남침 계획은 1950년 5월 29일 '선제타격작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확정됐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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