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알아봅시다.

크게보기

2) 유엔군의 반격 및 북진단계, 50.9.15~11.25



국군과 유엔군은 9월 중순 이후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자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을 단행하였다. 인천상륙부대인 미 제10군단은 9월 15일 기습적인 인천상륙에 성공하여 그 이튿날에는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경인가도로 진출하여 경미한 북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9월 18일에는 김포를 점령하였으며 9월 19일에는 한강선에 이르게 되어 그곳에서 도하작전을 전개, 서울 탈환작전을 개시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뒤이어 9월 16일에는 미 제8군도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약 1주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끝에 9월 22일~23일에는 북한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북한군은 9월 23일 이후 전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유엔군이 경부축선과 호남우회로를 따라 진격하였고, 국군은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 중앙선 축선과 동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서울이 실함된지 90일만에 이를 수복하고 97일만에 38도선을 회복하였다.




38도선 이남지역을 회복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 재발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북한군을 완전히 격멸할 목적하에 10월 1일부터 10월 11일 사이에 군단별로 각각 38도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전되어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은 10월 10일에 원산을, 17일에 함흥을 점령하였으며, 서부의 미제1군단은 10월 19일에 평양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중부의 국군 제2군단은 10월 18일 양덕을 거쳐 10월 23일에는 청천강선까지 도달하였다. 이 때 미 제10군단의 원산상륙작전계획은 그 시행이 지연되어 원산 외항에서 상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천강선에 도달한 국군 및 유엔군은 10월 24일에 그 곳에서 한만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10월 25일 국군과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불의에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었다.


중공군은 운산, 온정리, 희천 방면으로부터 대부대를 투입하여 국군 및 유엔군 공격부대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은밀히 밀려들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10월 26일에는 국군 제6사단의 선두부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하였으며, 서부지역에서는 미 제1군단 예하 제24사단이 11월 1일에 신의주 남방 27km 지점인 정거동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일단 공세가 좌절된 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11월 7일에는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때 국군과 유엔군을 뒤쫓아 공격하던 중공군도 일단 공격을 멈추고 청천강 북쪽 적유령산맥으로 이동해 감으로써 일단 접적이 단절된 채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게 되자 공산군 지역에 대한 공중공격을 강화하는 한편, 후방으로부터 1개군단(미제9군단)을 청천강 선에 추가로 투입하여 미 제8군의 전력을 보강한 다음 11월 24일을 기하여 다시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 작전은 1개월 이내에 북한군을 격멸하고 한만 국경선을 점령하여 전쟁을 완전히 종결짓는 것을 전제로 한 공세였으며, 일명 크리스마스공세라고 불리었다.

11월 24일 재공격을 개시한 미 제8군은 다음날 정주-운산-구창동-덕천-영원선에 이르게 되었으나 이 때 또 다시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동부의 미 제10군단은 11월 27일에야 그들 부대들이 이미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 놓이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한국전에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만 국경선을 목전에 둔 채 반격작전을 개시한 지 71일 만에 철수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