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73년 1월28일부로 파리 평화협정이 발효됨에 따라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래 20여 년간 계속된 제2차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평화의 시작은 곧 북베트남의 총 공세로 이저져 남베트남 패망으로 이어졌다.

불안한 평화협정 체제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협정의 이행 여부를 감독하기 위해 캐나다, 헝가리, 인도네시아, 폴란드 정부 대표로 구성된 국제 감시위원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조약 위반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조약 당사자들의 전쟁종결 의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파리 평화협정은 당사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국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었다.

결과적으로 파리 평화협정은 전쟁을 문서(文書)상으로 종결시켰을 뿐이며, 실제로는 미군 철수를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남베트남의 국민들도 평화가 올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실제로 전투는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보다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체결이후 20년 가까운 기간동안 남베트남의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또한 1965년 이후부터는 대규모의 미군과 외국군이 파병됨에 따라 그들의 소비에 의존한바 컸다. 그러나 외국군대가 철수하자, 시장은 위축되었고,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사회의 혼란도 가속화되었다. 경제를 지탱하던 달러의 유입이 줄어들면서 한때 부유함을 맛보았던 국민들의 불평은 높아만 갔다. 또한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함께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했고, 소총과 무전기 등 미국이 지원해 준 최신 군사장비가 베트콩들의 주장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평화협정 체결 후 지속적인 원조를 약속했던 미국의 지원도 급감하고 있었다. 1973년 11월, 미국 의회는 미군의 해외 파병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미군의 재개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 8월, 닉슨이 ‘워터게이트(Water Gate) 사건’으로 물러나자, 티에우는 가장 중요한 후견인을 잃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당시 남,북의 군사력은 외형상으로 비슷했다. 그러나 당시 남베트남에는 미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최신장비와 함께 110만 명의 병력, 세계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는 북베트남과 NLF의 전력은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반면 전투의지와 필승의 신념 등 정신전력까지를 고려한다면, 결코 우세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평화협정 체결 직 후 남, 북의 군사력 비교

평화협정 체결 직 후 남, 북의 군사력 비교 정보
구분 벽력수 편제 및 장비
남베트남군 1,100,000

11개 보병사단, 공수사단, 해병사단, 해군 및 공군, 전차 600대, 장갑차 1,200대

항공기 1,270대, 헬기 500대, 함정 1,500척

정규군 573,000
지방군, 민병대 527,000
북베트남군 1,100,000

15개 보병사단, 전차 및 장갑차 600대

항공기 342대

정규군 470,000
베트콩, 기타 530,000

제3차 베트남전쟁(해방전쟁)

베트남 중부지역의 북베트남군 공격 및 남베트남군 철수로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북베트남은 “미국의 재개입만 없다면, 대망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으나, 8년간에 걸친 미국의 북폭으로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국토는 황폐화 되었으며, 국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노이 정부는 남부의 세력 강화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호찌민 통로를 넓히고, 많은 인력과 물자를 남으로 내려 보냈다. 한편 티에우 정부 역시 남부지역에서 표범 무늬와 같이 곳곳을 점령하고 있는 NLF와 북베트남 점령지역을 묵과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지배지역 확대를 위한 국지전은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73년 10월에 개최된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티에우 정부의 전쟁 도발을 규탄하면서 자신들도 혁명전쟁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어서 이듬해 4월, 중앙군사위원회는 전쟁의 확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이 공격하면 반격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어서 1974년 10월,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총공세를 결의하고, 이에 앞서 시험적으로 사이공 북방 135km 지점의 푸옥롱(Phuoc Long)성(省)을 공격하기로 했다. 푸옥롱성을 목표로 선정한 이유는 그곳이 전략적으로 주요한 곳은 아니었으나, 남베트남군의 방어력이 미약했으며, 캄보디아 국경과 인접해 있어 점령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노이 정부의 보다 큰 목적은 시험공세를 통해 미국의 재개입 가능성을 확인하고, 남베트남군과 자신들의 전투능력을 비교해보기 위함이었다.

1974년 12월 13일, 북베트남군 2개 사단이 푸옥롱성을 공격하자, 하노이 정부가 기대했던 것처럼 푸옥롱성을 방어하고 있던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75년 1월 6일까지 성(省) 전체를 점령한 북베트남군은 통일에 대한 확신과 함께 “미국은 더 이상 자신들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푸옥롱성 공격을 통해 자신감을 확인한 하노이 정부는 1975년 1월 8일, “현재의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 남부를 해방한다”는 최종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공세를 시작한 북베트남군은 3월 8일부터 남베트남 전 지역에서 기만공격을 실시하다가 3월 10일, 3개 사단을 집중해 전략적 요충지인 부온마투옷(Buon Ma Thuot)을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부온마투옷이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되자, 티에우 대통령은 중부의 산악지역을 포기하고, 해안으로 철수해 인구 밀집지역을 집중적으로 방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북쪽의 제1군단은 산악지역에서 철수해 다낭(Da Nang)과 쭈라이(Chu Lai)를 확보하게 하고, 제2군단은 부온마투옷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대통령의 철수지시가 하달되자, 제1, 2군단은 각각 철수를 시작했는데, 선두부대가 철수를 시작하자, 군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가재도구를 챙기기에 급급하고, 민간인들 역시 살길을 찾아 피란길에 나섬으로써 피란대열은 시장의 행렬을 방불케 했다. 또한 곳곳에서 베트콩들의 기습이 가해지자, 피란대열은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한 채 2개 군단이 붕괴되고 말았으며,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극소수의 병력만이 해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베트남 중부지역의 북베트남군 공격 및 남베트남군 철수로
베트남 중부지역의 북베트남군 공격 및 남베트남군 철수로

남베트남의 패망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수립

북베트남이 총공세로 전환한 후 단 한차례의 공세로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던 남베트남군 2개 군단이 무너졌다. 오히려 하노이의 지도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제 하노이 정부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3월 25일, 하노이 정치국은 전략을 바꾸어 5월 중순의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이공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4월 2일부터 사이공을 향해 남진하기 시작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버리고 간 차량과 민간인 버스 및 트럭, 승용차 등 가용한 모든 차량을 동원했고, 부족한 운전병은 포로 중에서 충당했다. 수 만대의 차량이 남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자, 사이공은 대혼란에 빠지고, 미군 비행기는 사이공 정부의 주요 관리들과 가족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티에우는 4월 21일, 대통령직을 부통령에게 인계하고 사임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인수한 부통령 또한 4월 27일에 사임하고, 온건파인 즈엉반민(Duong Van Minh)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했다. 이에 따라 4월 28일, 대통령에 취임한 민(Minh) 장군은 하노이측과 협상을 시도 했으나, “민 장군이 대통령이 되면 협상하겠다.”던 하노이측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편 모든 부대가 사이공 주변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북베트남군은 17개 사단을 투입해 4월 26일부터 사이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철수해 온 남베트남군 7개 사단도 최후의 투혼을 발휘해 4월 28일까지 방어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8일, 군의 최고 책임자인 남베트남 참모총장 비엔(Cao Van Vien) 장군이 혼자만 살기위해 군복을 벗어버리고, 미 대사관으로 달아나 헬기를 이용해 탈출했다.

참모총장의 탈출로 남베트남군의 저항도 종말을 보게 되었으며, 미 대사관에 남아있던 미 해병대가 4월 30일 07:53에 헬기를 이용해 철수함으로써 미국인 철수가 완료되었다. 이때 주(駐) 베트남 한국대사관 이대용 공사를 포함한 140여 명의 한국인이 헬기에 탑승하지 못했는데, 이 공사는 5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다. 미군의 철수를 확인한 북베트남군은 날이 밝으면서 T-34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재개했다. 북베트남과 최후까지 협상을 시도하던 민 대통령은 북베트남군이 시시각각으로 밀려오고 있지만 협상의 진전이 없자, 4월 30일 10:20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降伏)을 선언했다.

사이공 정부의 항복 선언과 관계없이 북베트남군 전차 1대가 11:30경 대통령궁의 정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그들은 경비병을 무장 해제시키고, 12:45경 남베트남 국기를 끌어내린 후 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올렸다. 이어서 13:45경에는 후속부대가 도착해 대통령 집무실에서 민 대통령과 각료 및 보좌관들을 체포했다. 이로써 1955년 10월 26일, 지엠에 의해 건국된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인명피해만 해도 사이공 정부군 11만 명 전사하고, 49만9천명이 부상당했으며, 민간인도 41만5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노이 정부는 1975년, 정부군과 베트콩을 포함해 110만여 명이 사망하고, 60만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다 산업시설 파괴까지 고려한다면 베트남 전역은 거의 황폐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력에 의해 통일을 달성한 북베트남은 국가 통합에 착수해 NLF와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와 같은 기구들을 무력화시키고,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에 흡수 통합시킴으로써 명실 공히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 제3차 베트남전쟁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 ⓛ 유제현, 『월남전쟁』, 한원, 1992, pp. 362~461
  • ② 나종삼, 『월남파병과 국가발전』, 국방군사연구소, 1996, pp. 8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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